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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 Mar 01. 2022

의식의 여정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전시형식비평


PROLOGUE.


국립중앙박물관(이하 중앙박물관 또는 박물관)이 소장한 두 점의 '명품' 반가사유상이 새 집에 들어앉았다. 각각 국보 78호, 83호로 지정하여 관리해 온 이 불상들은 중앙박물관과 한국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손꼽힌다. 중앙박물관은 지금까지 불교조각실 한 편에 마련한 독립실에서 이 불상들을 선보여왔다. 두 점의 불상을 나란히 전시하기에는 전시실의 규모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박물관은 6개월을 주기로 불상을 교체하는 방식으로 운영하였다. 때문에 보통의 관람객이 두 반가사유상을 나란히 감상하는 것은 특별기획전이 열릴 때가 아니고서야 요원한 일이었다. 마침내 이번 개편을 통해 중앙박물관은 두 점의 반가사유상을 위한 독립 전시실을 마련함으로써 언제든 두 불상을 나란히 선보일 수 있는 전시환경을 갖추게 되었다. 새 전시실에는 '사유의 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박물관은 전시실을 보다 새롭게 조성하기 위해 이름 있는 건축가와 협업하는 방식을 택했다. 건축가 최욱(One O One architects)의 손끝에서 태어난 사유의 방은 다양한 건축장치와 영상매체가 한 데 어우러져 관람객에게 독특한 관람경험을 제공한다. 기존의 방식과 사뭇 다른 형식으로 인해 이 전시실에 대한 관람객의 평가는 적잖은 온도차를 보인다. 박물관과 전시를 둘러싼 서로 다른 가치판단이 개개인의 평가준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사유의 방에 대한 짧은 비평으로 기획되었기 때문에 여러 논점을 포괄하여 다루기엔 적절치 않다. 때문에 이 글의 목적은 사유의 방을 어떠한 당위에 비추어 평가하는 것이 아닌, 이 전시실의 형식-내용이 관람객의 몸-의식과 맺는 관계의 궤적을 규명하여 사유의 방이 이끄는 전시-경험의 윤곽을 드러내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글에 들어서기에 앞서, 이 글이 흘러가는 방식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은 사유의 방에 방문한 한 관람객의 경험을 장면단위로 나누어 추적하며 전개된다. 이는 사유의 방의 공간적 형식이 일종의 서사적 시퀀스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관람객의 경험이 두부 자르듯 나뉠 수 없는 것일지라도, 형식의 시퀀스를 각각의 장면으로 나누어 다루는 것은 경험의 분석에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 그렇기에 이 시퀀스를 이루는 각각의 장면들이 글을 구성하는 단락의 단위가 되었다. 각 단락은 공간의 형식과 관람객의 몸이 맺는 관계를 면밀히 기술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 상호작용이 추동하는 의식의 궤적을 추적하여 그 의미를 상술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로써 이 글의 독자인 당신은 이 전시실의 형식과 관람객이 맺는 관계의 총체이자, 관람객의 기억에 선별적으로 자리매김하는 의식의 궤적인, 전시-경험의 윤곽을 가늠하게 될 것이다.














SCENE 01.


보안게이트를 지나 박물관의 홀에 들어선 관람객은 바로 오른편에 자리잡은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선다. 2층에 내려서자, 상아빛 홀과 대비되는 검은빛 덩어리가 관람객의 시야에 성큼 들어온다. 덩어리의 존재에 의식이 강하게 이끌린 관람객은 이 덩어리를 향해 다가선다. 몸이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입구 왼편에 걸린 금빛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사유의 방』이다.

사유의 방은 박물관의 2층 한 구석에 자리 잡았다. 건축가는 전시실 외벽을 흑색 *템버보드(tambour board)로 마감하여 주변의 상아색 석재 마감과 강하게 대비시킴으로써 전시실의 존재를 선언적으로 드러내었다. 무광의 흑색 템버보드가 갖춘 미니멀리즘적 단정함 덕분인지, 이러한 선언은 방종하게 보지이 않는 선에서 잘 갈무리 되었다. 입구는 복도 벽면과 직교하는 매스(mass)를 찔러 넣어 열었는데, 이 작은 스케일의 건축적 장치가 관람객의 발걸음을 전시실 내부로 이끈다. 매스가 지시하는 동선의 끝에는 앞으로 펼쳐질 경험을 함축하는 짧은 발문이 자리 잡아 전시의 시작을 환기하고 있다.


* 템버보드(tambour board) : 가는 나무막대를 반복하여 이어붙인 인테리어 내장재의 한 종류.







SCENE 02.


입구에 들어서면 몸은 자연스럽게 왼쪽을 향하고, 관람객은 어두운 복도를 마주한다. 박물관의 밝은 홀을 지나온 관람객의 홍채는 눈앞에 펼쳐진 어둠에 신속히 대처하지 못한다. 갑작스러운 어둠을 마주한 관람객의 몸은 본능적인 긴장상태에 놓인다. 평소와 조금 다른 감각으로 인해 관람객의 의식은 어둠이 감싸 안은 당신의 몸과 복도의 물질성을 향한다. 평소에는 의식의 변두리에 머물던 냄새와 소리, 몸의 체적과 그것이 운동하는 궤적의 느낌들이 의식의 중심을 향해 다가온다.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귓가에 울리는 판자소리는 당신 몸짓의 반향으로서 이러한 의식의 지향성을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점차 어둠에 익숙해져가는 관람객의 눈은 당신의 몸이 위치한 공간의 세부를 더듬더듬 읽어낸다. 천장은 회백색 단면의 흑색 봉을 촘촘히 걸어내어 작은 점들이 어두운 공간을 별처럼 수놓도록 하였고, 바닥은 진한 갈색의 오크(oak) 널을 깔아 단정하게 마감하였다. 마주보는 양 벽은 나란히 하지 않고 오른편 벽이 관람객의 진행방향을 따라 점차 벌어지도록 두어 공간의 비정형적 동세를 만들었다. 오른편 벽을 따라 발길을 밝히는 선형(linear)의 간접조명이 먼저 눈길을 끌지만, 몇 걸음 떼지 않아 왼쪽 벽면을 가득 채워 흐르는 영상이 시선을 뺏어가며 공간의 동적 균형을 이룬다. 이 작품은 프랑스 작가 장-줄리앙 푸스의 신작 <순환>이다. 작가는 물의 상태변화를 소재로 물질적 자연의 순환을 그려냄으로서 불가철학의 관념적 자연관을 담아내었다.


영상에 눈길을 사로잡힌 관람객은 발걸음을 잠시 멈춘 채 벽을 타고 흐르는 형상들을 주시한다. 영상 속 형상들은 카오스적 패턴을 그리며 자연의 물질성을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영상매체를 통해 추상된 자연을 매개로, 관람객의 의식은 물질적 자연의 실존에까지 뻗어나간다. 머지않아 관람객은 당신이 서있는 공간이 물질적 자연의 상징체계임을 포착한다. 갈색(黃) 나무 널로 마감한 바닥은 대지(地)이며 어두운(玄) 천장은 하늘(天)이고, 영상 속 형상들은 천지(天地) 사이를 변화하며 순환하는 물질적 만물(萬物)이다. 몸과 공간의 물질성을 향하던 의식은 점차 자연의 물질성을 향하는 의식과 포개진다. 그 겹침 위에서, 관람객의 의식은 자연과 인간의 전일적 순환관계를 중심에 둔 불교적 관념성에 도달한다. 산사의 일주문을 지나 법당을 향하는 길이 불자(佛子)의 마음을 가다듬는 제례적 여정이듯, 사유의 방으로 향하는 길은 관람객의 의식이 물질적 자연으로부터 관념적 자연에 이르는 전이의 여정이다.







SCENE 03.


영상에서 눈길을 거두고 복도 끝에 도달한 관람객은 붉은 빛이 쏟아지는 방으로 향한다. 작은 극장 규모의 전시실이다. 가장 먼저 감각을 압도하는 것은 온통 붉게 치장한 벽면의 색감이다. 붉은빛 장식토로 마감한 벽을 윗부분이 밖을 향해 벌어지도록 살짝 기우렷다. 벽의 위쪽에는 간접조명을 사용하여 흙손질한 질감을 장식적으로 도드라지게 만들면서 공간의 상승감을 더했다. 바닥은 앞선 복도와 마찬가지로 나무 널로 마감하였는데, 특이하게도 입구 가까운 쪽으로부터 먼 쪽을 향해 점차 높아지는 오르막이다. 동시에 천장은 같은 방향을 향해 점차 낮아지기 때문에, 누군가 공간의 장축을 따라 전시실을 갈라 그 단면을 볼 수 있다면, 바닥과 천장이 한 방향을 향해 오므라드는 쐐기꼴을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기울어진 벽-바닥-천장이 만드는 깊이감과 상승감은 전시실의 독특한 동세를 낳는다. 입구에 선 관람객의 시선은 공간의 동세를 따라 자연스레 흐른다. 시선이 맺히는 오르막 위편, 어린아이만한 두 인형(人形)이 반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관람객은 홀린 듯 인형을 향해 천천히 걸음한다. 건축가는 과도한 경사나 계단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관람객이 당신 몸의 상승을 충분히 의식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경사를 따라 걸음을 옮길수록 기울어진 천장은 점점 더 많이 낮아지기 때문에 관람객은 오르막이 실제 기울어진 정도에 비해 더 가파르며, 당신의 몸이 실제보다 더 높이 올라가고 있다고 가늠한다. 통념적으로 높은 곳은 낮은 곳에 비해 더 ‘고귀하게’ 여겨진다. 때문에 몸의 상승을 의식하는 관람객은 당신이 높은 곳, 즉 ‘고귀한 곳’으로 향하고 있다고 여긴다. 결과적으로 ‘반가사유상을 향한 몸의 상승’이라는 물리적 관념은, ‘당신이 몸담은 *사바세계(娑婆世界)로부터 부처가 거하는 **정토(淨土)로 향하는 상승의 여정’이라는 종교적 관념과 쉽게 이어진다. 이러한 여정 속에 점차 감정이 고양된 관람객은 비로소 두 불상이 올라앉은 커다란 대좌 앞에 마주선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불교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를 일컫는 말

**정토(淨土) : 부처와 보살이 거주한다 여겨지는 청정한 국토.







SCENE 04.


커다란 대좌 위 두 보살은 영원의 시간을 틀어 앉아, 우주를 헤아리는 사유에 잠긴 듯 보인다. 정강이 높이까지 올라오는 고동빛 대좌는 두 불상을 아우르는 너른 타원 꼴이다. 타원의 *두 초점쯤엔 어른 가슴께의 기둥이 솟아있다. 두 보살은 이 기둥을 하나씩 나누어 올라앉았다. 그들의 사유가 물질의 형태를 빌려 굳어진 듯 유려한 대좌가 두 불상과 퍽 조화롭다. 대좌가 오르막 중턱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관람객은 비탈에 멈추어 선 채로 불상과 마주한다. 비록 오르막의 경사가 의식할 정도로 가파르진 않지만, 비탈에 멈춰 선 관람객의 몸은 바닥의 미세한 기울기를 예민하게 감지한다. 이 오르막은 관람객을 대좌 앞까지 이끌며 당신의 기분을 고양하던 건축적 장치이다. 이 장치는 관람객에게 걸음을 권유한다. 오르막의 낮고 높음이 공간의 위계와 방향을 만들기 때문이고, 그 위에 선 사람으로 하여금 기울어짐을 온몸으로 느끼도록 하는 역동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 오르막은 목적지에 도달한 관람객마저도 평평한 바닥에서보다 더 많이 움직이도록 유도한다.

결과적으로 오르막이 추동하는 관람객의 운동은 이 전시실의 본질적인 관람 형식과 태도를 규정한다. 관람객은 한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서지 않고, 탑을 돌듯 타원꼴 대좌를 따라 걸으며 어려 각도에서 두 불상의 모습을 훑는다. 시점의 이동에 따라 서서히 변화하는 불상의 윤곽을 감상하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일 뿐더러, 당신의 몸이 두 불상과 이루는 삼각형의 구도가 시시각각 변하면서 만들어내는 공간의 풍부한 시퀀스는 그보다 더 할 나위 없이 감각적이다. 이러한 형식은 마치 미술관이 모더니즘 조각을 대하던 방식과 유사하다. 이 형식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대상을 어떠한 텍스트적 맥락 속에서 읽어낼 것을 권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눈앞의 대상을 무목적적인 시선에서 순수하게 관조할 것을 권장하는 태도에 가깝다. 대좌를 둘러 싼 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자리를 옮겨가며 연신 두 불상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모습이 이와 같은 태도를 잘 나타낸다. 때문에 관람객의 의식은 대상의 물질적 특질 이면의 관념적 세계를 추적하는 사유에 천착하기보단, 대상이 당신의 몸과 상호작용하며 의식의 표층에 만들어내는 감각적 파문을 포착하는 일에 몰두한다.


* 타원은 평면 위의 두 정점으로부터 거리의 합이 같은 점들의 집합이다. 이때 타원을 정의하는 두 정점을 타원의 초점이라 한다.







SCENE 05.


대좌를 한 바퀴 돌아 제 자리로 돌아온 관람객은 다시금 불상을 마주한다. 연신 공간이 선사하는 감각적 자극을 즐긴 뒤 올려다본 두 불상의 표정이 사뭇 멋쩍게 다가온다. 두 보살의 깊은 사유가 당신의 들뜬 마음까지 헤아리는 듯 느껴졌기 때문일까. 관람객은 한차례 깊은 숨을 내쉬어 들뜬 마음을 다잡고 두 보살의 사유 속으로 함께 침전하고자 한다. 이제 불상의 호흡과 당신의 호흡을 맞추어 물아(物我)의 경계를 흐리면 관람객의 의식은 관념적 세계를 향한 사유의 여정에 나설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망하던 합일은 요원하다.

집중하는 관람객의 귓가에 삐걱대는 소리가 울린다. 아주 갑작스럽게 일어난 소리는 아니다. 다만 이제야 귀에 들어왔을 뿐이다. 고개를 살짝 돌리니 몇몇 다른 관람객들이 주변을 서성이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앞선 이가 그러했듯 대좌 주위를 돌며 여러 각도에서 두 불상을 감상하고 있다. 소리는 그들의 발과 바닥의 널 사이 어딘가에서 시작해 소극장 같은 전시실을 울리며 맴돈다. 어느새 관람객에게 몸을 바투 붙여오는 한 아무개는 스마트폰을 한껏 내밀어 두 불상의 적절한 구도를 확인하는 중이다. 여기저기서 울리는 셔터소리를 듣고 있자니 홀로 생각에 빠져들던 마음이 괜스레 유난스러운 기분이 든다. 관람객은 애써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기보단, 발걸음을 돌려 전시실을 떠나고자 한다. 인사하듯 올려다본 두 불상의 표정은 색(色)을 초탈하여 평온하기만 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그들의 사유 앞에서는 화려한 새 집도, 관람객의 웅성임도 모두 한 순간의 일렁임 일 뿐일 것이다.







SCENE 06.

관람객은 두 불상을 뒤로한 채 천천히 오르막을 내려와 전시실을 나선다. 나가는 길은 전시실 입구와 마주보는 귀퉁이에서 이어지는 또 다른 복도이다. 전시실에서 한번 꺾인 복도에 들어서면 복도 끝 밝은 빛이 여정의 끝을 알린다. 출구의 바로 왼편에는 두 불상의 사진을 담은 작은 리플렛을 마련하였다. 손이 이끄는 대로 집어든 한 장의 리플렛에는 짧은 여정의 여운이 짙게 남아있다.
















EPILOGUE.


사유의 방은 하나의 전시다. 즉, 관람객이 내용과 소통하는 형식을 규정하는 하나의 시도다. 여기서 내용은 공간-매체-유물 등 물질적인 대상과, 그 이면의 종교-역사-과학-철학 등 관념적인 대상을 포괄한다. 그리고 형식은 의식의 향방을 좌우함으로써 전시-경험의 윤곽을 규정하는 틀이다.


이 글을 관통하는 중심 테마는 바로 그 의식의 여정이다. 앞의 글에서 우리는 사유의 방을 방문한 한 관람객의 여정을 따라, 전시의 형식이 추동하는 의식의 궤적을 추적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관람객의 의식을 대상의 물질성으로 이끄는 강한 작용을 발견하였다. 이 형식의 작용이 만드는 전시-경험의 차이가 사유의 방을 다른 전시실과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이다. 이것은 하나의 유형이다.


반가사유상을 전시하던 옛 전시실을 살펴본다면 이 유형의 특징이 보다 두드러져 보일 것이다. 이 전시실은 사유의 방과 형식-경험의 유형적 궤를 달리한다. 비교를 위해서, 아래의 짧은 글을 통해 옛 전시실의 모습을 간략히 소개한다.

열 평 남짓한 ‘반가사유상 전시실’은 박물관 3층 불교조각실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지금도 전시실은 그대로지만 다른 불상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 전시실은 사유의 방과 비교하면 무척 작았지만, 한 불상만을 전시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제법 널찍했다. 방 한 가운데는 네 옆면을 모두 유리로 감싼 진열장이 있었고, 그 안에 반가사유상이 앉아 있었다. 공간은 온통 어두운 중에 진열장 뒤쪽 벽만은 붉게 칠하여, 불상은 붉은 배경 위에 은은히 빛나는 듯 도드라져 보였다. 전시실이 북적이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혹 열댓 명이 동시에 몰려들 때에도 큰 웅성거림이나 발소리 없이 무척 조용한 편이었다. 어쩌다 때가 맞아 사람이 없는 날이면, 진열장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무척 오랜 시간 불상을 마주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이 작은 방에는 따로 이름이 붙지 않았지만, ‘사유의 방’이라는 이름은 어쩌면 이곳에  더 어울린다. 이 전시실의 형식은 관람객의 의식을 눈앞의 물질적 대상 너머, 관념적 대상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즉, 이 형식은 관람객에게 사유를 권한다. ‘인원을 한정하는 전시실의 규모’, ‘배제된 장식성’, ‘어두운 조도’, ‘유리로 감싼 진열장’, ‘잠시의 머묾을 위한 의자’ 등 전시실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은 의식을 관념으로 이끄는 인도자에 가깝다. 전시실에 들어선 관람객의 의식은 먼저 반가사유상의 물질적 특질에 엉겨붙지만, 사유를 권하는 공간의 형식이 의식을 금세 관념의 세계로 끌어당긴다. 진열장 앞의 의자는 이 형식을 이루는 가장 특징적인 요소이다. 이 전시실은 ‘생각하기 좋은 분위기’를 갖추었다. 그리고 이 역시 또 하나의 유형이다.


위에서 살펴본 두 전시실의 내용적 차이는 거의 없다. 다만 두 전시실을, 그리고 관람객의 경험을 구분짓는 것은 전시실의 형식적 측면이다. 이러한 형식은 어떠한 가치판단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전시를 기획하는 이들은 여러 기준에 비추어 하나의 형식을 '선택'한다. 결국 전시를 둘러싼 수많은 논점에 대한 '판단'이 바로 그 선택의 기준이 된다. 결국 형식은 어떠한 가치판단과 독립적으로 실재할 수는 없다. 때문에 하나의 전시가 '잘 되었다'거나 혹은 '형편없다'라는 식의 평가는 결국 그 형식 이면의 선택과 판단을 평가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사유의 방' 역시 어떠한 판단과 선택의 결과이다,


우리는 사유의 방의 분석을 통해 그 형식이 이끄는 전시-경험의 유형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를 옛 전시실의 유형과 간략히 비교함으로써, 그 특징을 보다 뚜렷이 부각할 수 있었다. 하나의 유형을 파악한다면 그 이면에 얽힌 판단과 선택을 엿보는 것 역시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유의 방 이면의 여러 판단과 선택, 그리고 그 중심에 위치한 논점들을 파헤침으로써 또 한편의 글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박물관과 전시를 둘러싼 동시대의 다양한 이슈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는 제법 흥미로운 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글에 들어서며 밝힌 바대로 그것은 이 글에 주어진 역량을 벗어난다. 때문에 이 글은 여기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이 글에서 못 다한 이야기는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독자들에게, 그들의 사유라는 형태로 이어질 것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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