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역시 숫자만 보던 담당자였다
필리핀 할라우댐 이슈를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해외의 한 댐 사업이 아니라, 내가 과거 중앙부처에서 담당했던 ODA 업무의 구조였다. 신규 사업을 선정하고 검토하는 과정에는 생각보다 많은 허점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당시에는 사업 하나하나를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다. 신규 사업을 선정할 때 산하기관이 기획해온 3~4개의 사업안 중 가용 예산에 맞춰 1~2개를 고르고, 이를 바탕으로 예산을 확보하는 절차가 반복됐다. 중앙부처 입장에서는 현지 상황을 직접 알기 어려웠고, 결국 산하기관의 설명과 수원국이 제출한 서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 서류가 과연 실질적인 검토와 평가가 가능한 수준이었느냐는 점이다. 현지 수요, 환경 영향, 주민 생활에 미칠 효과 등을 담은 문서가 제출되기는 했지만, 수원국 정부 역시 ODA 사업을 유치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사업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자료가 정리되는 경우가 많았고, 중앙부처는 이를 검토하고 평가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수원국 정부가 제출한 서류를 ODA 평가기관에 전달하는 정도에 그쳤다. 담당 부처가 예산확보를 위해 재정경제부에 사업설명을 하고나면 외교부와 국무조정실에서도 추가로 검토하는 절차가 있기는 했지만, 이마저도 여러 부처에서 같은 지역에 유사한 사업을 중복하여 제출하지 않았는지 등을 보는 정도였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사업 선정 단계에서 공여국이 현지 상황을 독립적으로 검증하고 실질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구조였는지 의문이 남는다.
할라우댐 이슈
필리핀 할라우댐(정식 명칭: Jalaur River Multipurpose Project Stage II)은 필리핀 파나이섬 일로일로 지역에 건설된 대규모 댐 사업이다. 이 사업은 농업용수 공급, 생활용수 확보, 수력발전, 홍수 조절을 목적으로 추진되었으며, 한국 정부의 ODA(공적개발원조) 유상원조 자금이 투입됐다. 재원은 한국수출입은행의 EDCF 차관을 통해 조달되었고, 시공에는 국내 건설사가 참여했다. (위키백과)
문제가 된 것은 사업의 추진 과정이다. 현지 선주민 공동체인 투만독(Tumandok) 주민들은 사업이 자신들의 충분한 동의 없이 진행되었고, 삶의 터전과 조상 대대로 이어온 토지가 침해되었다고 주장해왔다. 특히 일부 주민들은 자신들이 사업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착공이 이뤄졌다고 증언했다. (AlterMidya)
또한 사업 과정에서 강제 이주, 생계 기반 상실, 환경 훼손, 지진 위험 지역 입지 문제 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고, 주민 반대 과정에서 인권침해 논란까지 불거졌다. 2020년에는 댐 반대 활동과 연관된 선주민 지도자 사망 사건으로 국제사회에서도 크게 주목받았다. (Eco-Business)
현지 주민 인터뷰를 보면 현지 주민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사업이 기획되고 착공되었다고 한다. ODA는 본래 수원국 주민의 수요와 현지 환경의 지속가능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사업이다. 그러나 할라우댐 사례에서는 대규모 인프라 사업을 수주했다는 성과와 홍보가 그 가치를 앞질렀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돌아보면 나 역시 ODA 업무를 담당할 때, 사업이 현지 주민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고민이 부재했다. 대신 우리나라가 ODA 사업을 통해 얼마나 큰 경제적 효과를 창출했는지를 내세워 보도자료를 내는 일에 더 익숙했다. 시행사에 중소기업이 참여해 국내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 몇 억 원 규모의 사업을 수주했다는 점, 얼마나 많은 예산이 투입되었는지와 같은 ‘숫자’가 늘 성과의 중심에 있었다. 우리나라의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설명하는 참고자료를 보도자료에 덧붙이면서 스스로 흐뭇해하기도 했다. 착수회의나 중간 점검회의에서도 중앙부처에서는 현지 상황을 잘 알지 못하니 수원국과 산하기관의 설명에만 의존했고, 부끄럽지만 주민의 삶과 환경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는 사실상 부재했다.
우리나라는 ODA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냈다고 오랜 기간 자화자찬해왔다. 하지만 인권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제 ODA도 성과 중심의 개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큰 규모의 사업을 수주했는지보다, 그 사업이 실제로 누구의 삶을 변화시켰는지, 현지 주민의 권리와 환경의 지속가능성을 얼마나 지켜냈는지를 묻는 질적인 성장의 고민이 더 필요하다. 할라우댐 이슈는 필리핀의 한 댐 사업 문제가 아니라, 우리 ODA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처럼 느껴졌다.
이번 할라우댐 이슈를 다시 들여다보며, 무엇보다 이런 문제가 조용히 잊히지 않도록 꾸준히 목소리를 내주는 공익인권법재단 공감과 시민사회 단체들의 활동에 고마움을 느꼈다. 해외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이유로 우리 사회의 관심 밖으로 밀려날 수 있었던 문제를, 국제 인권의 관점에서 드러내주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보며 공익변호사의 활동 영역이 비단 국내 인권 문제에만 머무르지 않고, 해외 ODA나 국제개발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권 침해 문제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개발의 이름으로 가려졌던 목소리를 다시 세상 밖으로 꺼내는 일, 그리고 국가와 기업의 책임을 묻는 일 역시 법의 중요한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