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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재난을 겪으며 배운 것들

참사와 행정 사이에서 마주한 한계

by 밤나무


세월호 참사로 시작된 질문


세월호 참사를 바라보던 그날의 무력감이 지금까지도 내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다.


대학 시절, 4·16 참사를 바라보며 느꼈던 충격과 무력감은 오래 남았다. 그날 이후 사회적 재난은 뉴스 속 타인의 비극이 아니라, 언제든 나와 내 가족에게 닥칠 수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국제기구에서 인턴으로 지내던 시절, 세월호 참사 2주기를 추모하기 위한 작은 영화제를 기획했다. 한국인뿐 아니라 회사 동료를 비롯한 많은 외국인들이 퇴근 후 늦은 시간 한자리에 모여 묵념하고, 추모 영화를 숨죽여 보며 공감해주었다. 그 순간 사회적 재난이나 인권 앞에서는 국적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인간으로서의 공감이야말로 사회를 바꾸는 출발점이라는 것을 느꼈다. 많은 이들의 추모하는 마음이 모이니 헛헛했던 내 마음 한 켠도 위로받은 날이었다.


그 경험은 공익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는 동기를 더욱 단단하게 했다. 세월호 이후에도 반복되는 사회적 재난들을 보며, 무력감 속에서도 누군가는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의 문제를 조금이라도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일에 참여하고 싶었다. 그렇게 마음의 방향이 구체적인 ‘공직’이라는 길로 이어졌다.



이 글은 내가 겪은 일을 구체적으로 밝히거나 내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회적 재난 앞에서 정부가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무엇이 가장 아쉬웠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디서부터 바꿔야 하는지를 돌아보고 싶다.


참사는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피해자를 시혜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에서 벗어나, 행정의 편의보다 사람의 생명과 권리를 우선하는 태도—그 출발점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남긴 교훈


세월호 이후에도 우리는 크고 작은 사회적 참사를 계속 겪었다.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현장, 피해자보다 행정의 편의를 우선하는 대응, 그리고 책임을 회피하는 조직의 모습은 늘 비슷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제도의 미비 이전에, 정부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실감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현대 사회에서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이었다. 수많은 피해자가 일상 속에서 아무런 의심 없이 사용한 제품으로 생명을 잃거나 평생의 고통을 안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대응은 참사의 무게에 비해 한참 뒤처져 있었다.


처음 피해가 드러났을 때, 부처들은 서로의 영역이 아니라며 책임을 미뤘다. 환경부는 복지부가 조사하고 있다며 한발 물러섰고, 복지부는 전염병이 아닌 오염물질 피해조사는 권한 밖이라는 입장을 내세웠다. 식약처는 공산품이라 규제 권한이 없다고 했고, 국립환경과학원은 “당시 기준으로는 유독물질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누구도 ‘내 일’이라 말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아쉬웠던 것은 정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인식이 희미했다는 점이었다. 피해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각 부처는 위험을 줄이기보다는 책임을 줄이는 데 익숙한 모습이었다. 결과적으로 국가가 안전성을 보장한 것처럼 보였던 제도적 외피 아래에서 수많은 국민이 피해를 입었다.


이 참사는 단지 몇몇 기업의 문제나 특정 부처의 실책이 아니라, 정부 전체가 위기 앞에서 얼마나 분절적으로 움직였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행정의 한계와 리더십의 부재


참사 대응 과정을 지켜보며 느낀 것은, 정부가 하나의 유기체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각 부처는 자기 역할만 지키는 데 익숙했고, 다른 부처의 일에는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 이런 칸막이 행정은 위기 대응에서 협력보다는 분절을 낳았고, 피해자 구제는 그 틈에서 늘 늦어졌다.


나는 최근 가습기살균제 관련 국가배상 소송 대응 업무에 일부 참여한 적이 있다. 소송 대응을 위해 행정 내부의 논의 과정을 지켜보며 다시 한 번 느꼈다. 참사의 본질이 ‘국가의 법적 책임이 있는가’라는 문제로만 다뤄질 때, 그 뒤에 있는 피해자들의 고통과 사회적 의미는 얼마나 쉽게 희미해지는지를.


공무원 조직은 본질적으로 ‘위험 회피’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 실수를 하면 비판을 받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처벌받지 않는 구조 속에서 대부분의 선택은 소극적이 된다. 보고가 실질적인 문제 해결보다 우선되고, 문서의 완결성이 사람의 사정보다 앞설 때가 있다. 책임을 나누기보다 줄이려는 태도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문제는 시스템만이 아니라 관리자의 리더십에도 있다고 본다. 개개인의 공무원들은 관리자의 방향 설정에 따라 움직인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장차관 등 정치적 책임을 지는 관리자가 적극적인 태도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야, 실무자들도 그 안에서 과감하게 일할 수 있다.


행정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다루는 영역이라면, 단 한 번의 실수보다 ‘하지 않은 책임’이 더 큰 문제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 인식이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정부는 참사 앞에서 변명 대신 책임으로 응답할 수 있을 것이다.



피해자의 인권을 존중하기 위하여


사회적 참사는 결코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세월호, 가습기살균제, 이태원, 오송 참사 등 수많은 비극을 지켜보며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재난의 형태는 달라도, 그 뒤에 남는 상처는 비슷하다. 피해자들은 사고의 원인 규명과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지만 그 과정에서 또 한 번 소외되고, 때로는 혐오 발언과 같은 2차 피해에 시달린다. 진상조사와 배상 절차는 길고 복잡하며, 피해자들이 전면에 나와 싸워도 쉽게 문이 열리지 않는다.


정부는 재난을 ‘관리’의 관점에서 접근해왔다. 피해자를 돕는 일도 행정 절차의 일부로 취급되고, 인권보다 행정편의가 우선되는 구조가 여전히 남아 있다. 보고서와 대책은 많지만, 피해자의 삶을 실질적으로 회복시키는 행정은 많지 않다. 피해자는 여전히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머물 뿐,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시민으로 존중받지 못한다.


사회적 참사가 반복될수록 필요한 것은 기술적인 매뉴얼보다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다. 피해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권리를 제도 속에서 보장하는 것이 재난 대응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정부와 언론, 정치인 모두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피해자에 대한 혐오나 낙인을 막기 위한 자정작용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 모두가 이런 비극을 ‘남의 일’로 두지 않는 것이다. 사회적 참사는 언제든 우리 누구에게도 닥칠 수 있다.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는 것—그것이야말로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고 믿는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마주하며 나는 그 사실을 다시금 실감했다.



행정의 자리에서 법의 길을 꿈꾸다


가습기 살균제 소송 대응 업무를 하던 중, 2022년 9월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가 발표한 가습기살균제참사 종합보고서를 받았다. 수천 쪽에 달하는 기록물과 조사 결과가 담긴, 3년여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나는 그 책자를 무거운 마음으로 읽어내려갔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내 역할은, 그 보고서의 논리적 허점을 검토하고 정부의 방어 논리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정부의 논리를 만들기 위해 전문가들과 회의를 하고 보고하는 과정에서 참사의 본질이 흐려지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공무원으로 일하며 배운 건, 행정의 힘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 힘이 법과 제도의 틀 안에만 머물 때 얼마나 쉽게 무뎌질 수 있는지도 느꼈다. 그 경험이 나로 하여금 법조인의 꿈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법은 제도를 움직이는 언어이고, 그 언어를 통해 피해자의 권리를 지키고 때로는 정부에 책임을 묻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


행정의 세계에서 배운 한계와 가능성을 모두 품은 채, 피해자의 권리가 행정의 편의보다 먼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


참사는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그리고 나에게 그 태도의 변화는, 공무원으로서의 한계를 마주한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그때 느꼈던 답답함과 책임감이 지금의 결심을 만들었다. 그 감정을 잊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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