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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린뿔 Jun 24. 2021

필명(筆名)의 이유

다른 무엇도 아닌, 기린의 뿔

브런치 프로필 사진

[사진 설명] 사진 모서리에는 검정 테두리가 창틀처럼 굵게 칠해져 있다. 흰색 바탕 왼편에는 진한 글씨로 '기린뿔'이라는 닉네임이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양 옆이 둥근 사각형 네 개가 가로 일렬로 놓여있다. 양 옆이 둥근 사각형 안에는 왼쪽부터 차례대로 각각 '미디어, 에세이, 사회, 학생'이 쓰여 있다. 흰색 바탕 오른편에는 정면을 응시하는 기린의 얼굴 사진이 원 모양으로 놓여 있다.




기린은 뿔이 있다. 목 길이에 비하면 훨씬 짧고, 뭉툭한, 보잘것없는 뿔. 가뜩이나 높은 모가지에 무슨 이유로 뿔까지 달려있는지. 나로서는 그 심오하고 우연한 진화 과정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진화가 항상 (생존에 유리한) 생물학적 발전과 '쓸모'를 가져오는 여정은 아니라지만, 어떤 기능도 없이 그냥 있다고 말하기에는 석연치 않다.

달려있어도 아무 쓸모가 없으니 잘라내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또 그럴 수는 없다. 엄연히 뿔 속에는 혈맥이 있고 붉은 피가 흐른다. 함부로 없애자고 말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다. 기린의 다른 신체 부위와 뿔이 이어져있는 한, 기린뿔은 그것의 쓸모와 관계없이 존재 자체로서 가치를 가진다.

그리고 기린에게 찾아가 "기 선생님, 당신 머리에 달린 뿔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정중하게 물은 적도 없으니 더욱이 자를 수 없다.


그 ‘석연찮음’이 좋았다.


어릴 때부터, 구체적으로는 휠체어를 타게 되면서, 더 자세히 말하면 근육에 힘이 없어지면서 타인과 내가 다른 존재라는 인식이 삶 여기저기에 새겨졌다. 지금은 이런 경우가 거의 없지만, 예전에는 내 몸이 사람들로 가득 찬 공간에 들어서면 찜찜한 시선이 스쳐갔다. “이곳은 너와 어울리지 않아.”라는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다. 타인과 온전히 함께할 수 없는 신체라 늘 내 존재는 석연찮았다. 어쩌면 그 생각은 혼자만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르나, 적어도 내 몸으로 어딘가 마음대로 뛰어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계단과 높은 턱 앞에서 물러나야 하고, 길거리에서 적당한 화장실을 찾을 수 없으며, 오래 앉아있으면 온몸이 뭉치고 뻐근해지는 몸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요구한다. 엘리베이터와 경사로가 필요하고, 휠체어와 활동지원사가 모두 들어갈만하고 휠체어를 회전시킬 수 있는 널찍한 장애인 화장실이 필요하다. 만약 긴 시간을 보내야 할 곳―대표적으로 학교와 직장―이라면 휴게 장소와 침대가 필요하다.

늘어가는 조건을 요구하는 것은 마땅한 권리지만, 권리를 얻기 위해 겪어야 할 고난은 괴로운 장벽이다. 그리고 나의 권리를 누군가의 호의로부터 기대해야 하는 것은 무력하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더욱 뻔뻔하게 주장해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말하기도 전에 몸에 필요한 조치를 모두가 알아주는 것이지만, 아직까지는 필요한 지원 목록을 도돌이표 마냥 반복해서 읊어줘야 하는 피로하고 답답한 현실이다.

사람마다 구체적으로 필요한 것이 다르니 사람 몸에 정해진 매뉴얼을 일률적으로 입힐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도 '기본'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너무나도 당연한 필요조건조차 갖추지 않은 상황에서 몰랐다는 해명이 정당하길 바라는 요행은 치사하기까지 하다. 아마 장애인의 존재감이 온 세상을 울리기 전까지 이 '무지의 변명'은 유효할 것이다.

정작 지하철에 전동휠체어 여러 대만 들여도 민폐 소리를 듣고, 긴급 탈시설만 요구해도 잡혀가는 판국이다. 주위에 장애인이 없으니 "몰랐다"로 일관하고, 그렇다고 불편을 알리니 불청객 취급을 받고, 결과적으로 일상 속에 존재를 드러내는 것부터 어려운 트릴레마(trilemma)다.


휠체어를 타면 늘 타인보다 낮은 시선에 머무른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이 일어난 곳에서는 모든 시야가 가려진 채 거인들의 세계에 꼼짝없이 갇힌다. 높고 높은 '사람 창살'에서의 탈출을 희망했다. 그래서 더 높고 높은 것을 동경했다.

10년 전, 15살 때 찍은 사진을 우연히 봤다. 척추측만증 수술을 받고 1년 반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내 몸이 버티기에 수술이 힘겨웠던지 무려 31kg까지 살이 빠졌었다. 다행스럽게도 이후에는 살이 붙어서 해골 신세는 면했다(요즘은 오히려 살이 쪄서 고민이다). 어찌나 말랐던지 목뼈 모양이 뒷목에 그대로 드러났다.


목만 뻗은 기린이 떠올랐다.


만일 기린의 일부가 된다면 가장 높이 있는 ‘뿔’이 되고 싶었다. 지겨울 만큼 오랜 시간 동안 낮은 시선으로 머물렀으니, 더 높은 곳으로 향하고 싶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와 닮은 대상을 찾은 기분이었다. 높은 곳을 희망하며 삐죽 뻗어 있지만, 그다지 아름답지도 쓸모가 있지도 않은 의문스럽고 석연찮은 대상이 바로 ‘기린뿔’이다. 내가 꼭 그런 존재 같았다.

나에게 ‘기린뿔’이란 이름은, 가장 닮아 있으면서도 가장 닿을 수 없는 모순에 붙여진 꼬리표다. 꼬리표의 향기는 슬프도록 짙다. 그래서 다른 향으로 덮을 수 없다. 다만 주어진 유일한 수단은 삶에서 피어오른 수많은 모순을 내 시그니처로 삼는 수용과 성찰이다.

‘정상(正常)’이라 이름 지어진 것들을 욕망하며, 끝내 도달할 수 없음에 체념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출 게 아니라 반대로 무엇이 ‘정상’을 욕망하도록 이끌었는지 되묻고, ‘정상’ 그 차체에 의문을 던지며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 다양한 삶을 담지 못하는 정상의 틀이 어떤 존재를 ‘비정상’으로 호명하고 심지어 생존할 수 없게 축출한다면, ‘정상’은 더 이상 평범의 요건이 아니라 ‘평범하게 되기’를 내세운 폭력의 다른 이름이다.


비장애의 틈바구니에서 자기 가치에 회의감이 드는 육체로 ‘평범함’을 행할 수 없는 운명을 기어이 살아야 하는 불구의 존재.

언젠가 저 한마디로 스스로를 정의 내린 날이 있다. 막상 ‘나’를 제멋대로 정의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평범’은 뭐고, ‘불구’는 또 뭔가. 비장애는 평범하고, 장애는 그저 불구인가. 분명 장애가 변수가 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

신체적 조건이 아닌 다른 요소가 기준이 되는 상황에서 ‘평범’의 뜻은 달라지고, 평범과 ‘평범하지 않음’ 사이에 만들어진 경계는 해체된다. 평범함의 기준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든 상황과 맥락 속에서 영원한 ‘평균값’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 해체의 현장 속에서도 지울 수 없는 몸의 한계가 스스로를 규정했다. 나는 미래를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이들을 따라가는 것 말고는 어떠한 대안도 내게 제시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불안하고 두려웠다. 시간이 어떻게든 해결해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만으로 모두가 타고 가는 물결에 함께 휩쓸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여러 고민과 한계가 나를 어지럽혔다. 그럼에도 존재는 남아있으므로 나는 석연찮은 존재로서 여기,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 물론 혼자서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기린뿔처럼 그 쓸모와 상관없이, 타인과 연결되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가치가 완성되는 삶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완결적인 존재 가치가 아니라 ‘관계-완결적인’ 존재 가치를 실현하는 삶이다.


“네 존재 이유를 해명하라.”


생각해보면 우스운 요구다. '존재'에 대체 어떤 해명이 필요한가. ‘이미 여기 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이 이 세상 어디 있는가. 존재에게 쓸모를 들이대려는 발상부터 모순이다. 사람은 '쓸모'가 아니라 함께 숨 쉬는 ‘존재’로서 인정받아야 한다.

이는 칸트가 말한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근대 계몽주의의 오래된 문장과 닮아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이 가장 맹렬하게 작동한 시기는 근대이다. 근대의 방식은 ‘비정상’을 한 곳에 몰아넣고, 규율과 통제로써 이들을 ‘정상’으로 교정할 수 있다는 아주 순진하고 낙관적인 인간 예찬이 도리어 어떤 삶을 짓밟는 폭력적인 형상이었다.

지금도 그 형상은 남아있으며 누군가는 이미 경험하고 있다. 폭력은 교묘히 살아있되, 욕망의 내용은 달라졌다. 교정하려는 욕망보다 ‘배제하려는 욕망’이 훨씬 커졌다. 어떤 존재가 일상을 사는 행위는, 일상을 살아가기 위한 조건이 먼저 갖춰지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그런데 여러 이유로 일상을 살 권리가 박탈된 자들을 공동체로 맞아들이는 여러 ‘조건’을 채우는 게 아닌, 권리의 자격을 논하며 타인이 내리는 결정 속에만 머물라 명한다. 그리고 공동체 밖으로 밀어낸다.

타인에 의해 권리가 규정되는, 주체가 사라진 현장에서 ‘관계’는 맺어지지 않는다. ‘나’의 말소리가 타인의 말소리를 만날 때, 두 말소리는 의미를 얻고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서로의 기억에 남아 다음 만남을 기약하게 한다. 이야기가 탄생하는 이 대화의 구조가 무너진 곳에서는 관계도, 일상도 그 의미를 잃는다. 여기서 공동체가 행할 몫은 ‘대화의 복원’이다. 나아가 그를 통한 ‘권리의 탈환’이다.


권리를 말하면 의무와 권리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러나 권리와 존재의 관계를 먼저 논하는 경우는 드물다. ‘의무’는 국가나 사회라는 매개체를 거쳐 개인과 세계가 접촉하는 규범이며, 다수의 권리 보호를 위한 사회계약을 목적으로 한다. 이와 달리 ‘권리’는 구조적 매개를 거쳐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부터 주어진다. 어떤 조건과 이유가 아닌 ‘개인의 실존’을 근거로 한다. 즉 살아 숨쉬기 때문에 권리가 생겨난다. 권리는, 각 존재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사회계약의 목적을 가진 의무와 다르게 존재와 이어진다. 목적 없이 그저 존재하는 것. 말장난 같지만 목적이 없는 것이 곧 목적인, 무목적이 바로 권리의 목적이다.

권리는 존재로부터 피어나고, 의무는 공동체 유지와 개인 권리 보장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목적에서 등장한다. 만약 의무가 먼저라고 한다면 공동체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누군가의 존재가 부재하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공동체가 생기기 이전에도 이미 개인은 살아있기 때문에 존재는 부정할 수 없다. 의무의 선행을 전제로 하는 것은 언제든지 공동체의 이름으로 배제되는 존재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내포한다. “권리 이전에 의무”라는 말은 부정할 수 없고, 또한 모든 것에 선행하는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는 명제이므로 성립할 수 없을뿐더러 성립해선 안 된다. 누군가의 존재를 지울 수 있는 위험한 말속에 어떤 이도 갇혀선 안 된다.


이유 없이 툭 튀어나와 있는 뿔이 보기가 싫어도 쓸모가 없어도, 그것을 보이지 않게 재단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 석연찮은 존재 이유는 그 자체로 이유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누군가의 '보기 싫음'이 권리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단순한 '보기 싫음'을 이유로 비정상으로 여겨지는 타자를 쫓아내거나, 도시 한 구석에 몰아 놓겠다는 발상은 실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존재를 지우는 기획이다. 이 기획에서 존재는, 근원을 알 수 없거나 편견의 시선으로 들어찬 '보기 싫음'의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 선에서 허락된다. 그리고 존재를 제한하는 결정이 공적으로 ‘옳다’고 주장할 것이다.

어떤 이의 소망에 따르면 세상은 어쨌거나 ‘정상’으로 가득해야 하고, ‘비정상’스러운 뒤틀리고 징그러운 맨몸의 존재는 보이지 않아야 한다. 어떤 공간에 유폐된 채로, 말을 꺼낼 수도, 타인과 사랑할 수도 없다. 그렇게 일상을 평범하게 지낼 권리를 빼앗긴 채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 일상을 평범하게 산다는 것은 정해진 삶의 코스를 따라가는 그런 종류의 평범함이 아니라, 인간적인 존재로서 관계를 맺고 우정과 사랑과 연대를 실천하는 토대 속에서 살아 숨 쉴 수 있는 ‘평범함’이다. 호흡처럼 스며드는 평범의 소소한 기쁨은 모두에게 주어져야 한다.


기린뿔은 평범함이 주어지지 않는 모든 자를 향한 은유이다. 어울리지 않는 곳에 홀로 떨어져 있어 보이지만, 그 속에는 피가 흘러 늘 삶과 이어져있다. 그리고 이 피는 심장에서 뿜어져 나와 긴 목을 거친 후, 뇌와 뿔로 퍼진다. 다만 2m가 넘는 목을 지나 높은 부위까지 혈액이 전달되려면 심장은 강한 압력을 유지해야 한다. 이 높아진 혈압이 곧장 뇌로 전달된다면 기린은 뇌출혈을 겪게 될 거다. 그래서 기린에게는 혈압을 낮춰주는 혈관 구조인 ‘원더 네트(wonder net)’가 있다. 덕분에 물을 마시기 위해 고개를 숙일 수 있다. 살아갈 수 있다.

먼지처럼 흩뿌려진 혐오의 시선은 누군가의 삶을 앗아갈 만큼 잔인하다. 칼날 같은 말들이 어떤 개인에게 날아들 때, 그 아픔은 한 존재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고통이다. 아픔을 혼자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사람은 강하지 않다. 그렇기에 함께 아픔을 나누고 서로 보듬을 자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자리를 언제까지나 사람으로 채울 수는 없다.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치 기린을 높은 혈압에서 지켜주는 ‘원더 네트’처럼, 아픔을 겪는 사람들의 일상을 지켜줄 시스템을 구성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어린아이로 태어나 무사히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수 있는 세상1)이 되어야 한다.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또 사랑하고 있을 기린뿔과 같은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만약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뿔이 썩어가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머리에도 피가 퍼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생명’이 끊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뿔과 같은 사람들이 삶을 위협받는 세상은 얼마나 심각하게 망가진 것일까? 그들의 아픔은 세상의 아픔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세상의 가장 잔인한 부분과 늘 맞서야 하니 그 아픔의 정도는 더 클 것이다. 여태 기린뿔에 상징적으로 부여된 ‘쓸모없음’만을 이야기했지만, 정작 중요한 사실을 빼놓았다. 그건 뿔의 ‘단단함’이다. 모든 아픔을 이겨낼 수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서로 닮은 아픔들이 있어, 더는 흩어지지 말자고 손을 붙잡는다. 그렇게 아픔을 겨우내 보듬으며 그들은, 우리는, 그리고 나는 머리 위에 달린 저 정체불명의 기린뿔처럼 꿋꿋이 살아갈 것이다.



1) 장혜영 -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https://youtu.be/AYK9IN9hP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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