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23~26일, 여행 367~370일, 페루 트루히요
바뇨스의 꿀맛 같던 휴식이 가득했던 에콰도르를 떠나 나에겐 약속의 땅과 같은 페루로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등학교 동창들이 페루로 가을 추석 연휴 휴가를 오기 때문에 그들을 보기로 했다. 다만 오는 날짜가 조금 있다 보니 만나기로 했던 장소에서 보려면 조금 대기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페루의 첫 도시였던 트루히요는 그래서 천천히 둘러보게 되었던 것이다.
에콰도르 바뇨스에서 페루로는 한 번에 가는 교통편이 없다. 꽤 많은 시간과 경유를 요구하는데, 최초 내 계획은 에콰도르 바뇨스에서 과야킬로, 과야킬에서 페루 치클라요로, 이후 치클라요에서 트루히요로 가려고 했었다. 헌데 바뇨스에서 예정된 시간에 버스를 타려는데 매진이란다. 두 시간 뒤의 버스를 타야 했는데, 이 버스의 도착시간이 다음 버스에 조금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치클라요가 아닌 다른 도시인 피우라를 경유하는 경우의 수를 준비하기로 했다. 첫 단추부터 꼬이기 시작했고, 과야킬에 도착해서 그 슬픈 예감은 또 적중한다. 피우라로 가는 버스가 또 매진되어 버리고, 중간 기착지인 페루의 툼베스까지만 가는 버스만 남아있었다. 검색을 아무리 해봐도 툼베스에서 간 사람들의 후기가 없었지만 툼베스는 페루-에콰도르 국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고, 거기서 가는 버스가 있을 것이라는 창구 직원의 말에 그냥 가보기로 했다.
마지막 남은 좌석을 얻어 기뻐했는데, 그곳은 좌석이 아니라 뒤의 빈 공간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엉덩이의 배김을 참으며 가야 했다. 내가 앉은 뒤쪽 좌석에는 베네수엘라 사람들 네 명이 주르륵 앉아있었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최근 베네수엘라 정세가 심각하다. 인플레이션은 최고조에 달하며 정치문제도 간단하지 않아 여행경보도 올라가고 여행자들도 쉽게 발걸음을 옮기는 국가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곳에서 줄줄이 다른 나라로 여행을 빙자한 도피를 하고 있었으니 신기할 수밖에. 물론 그들의 눈에는 남아메리카를 여행하는 내가 신기했을 것이다. 그 친구들의 짧은 영어와 나의 짧은 스페인어를 섞어가며 베네수엘라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명은 페루 리마로, 나머지 세 형제는 칠레 산티아고로 일을 찾아 이동 중이었다. 말이 안 통할 땐 하하 웃어버리며 그들과 함께 페루로 향하고 있었다.
경로도 바뀌고 2시간 반이라는 엄청난 국경 대기시간에도 불구하고 낯선 사람들과 함께했던 소소하고 재밌는 시간 덕에 페루를 넘어오는 길이 그렇게 지루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툼베스에서 트루히요로 한 번에 가는 버스를 찾을 수 있었고, 그들과는 칠레에서 (리마 사는 한 명은 나에게 덜 적극적이었기에) 보기로 하고 헤어졌다.
트루히요는 굉장히 큰 도시이다. 하지만 도심엔 볼거리가 없고 주변으로 나가면 유명한 것들이 몇 있는데, 특히 유명한 것은 귀여운 고대 유적지(?) 찬찬과 서퍼들의 천국으로 불린다는 완차코 해변. 하루에 몰아서 이 곳들을 보고 오기로 했다. 날씨가 아주 좋지는 못해서 선선하다 못해 서늘한 날씨를 안은 채 로컬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찬찬 유적은 트루히요 중심가로부터 약 3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찬찬 유적의 유래나 의미보다 사실보다 보면 귀엽다. 찬찬 유적의 최대의 매력은 바로 그것이다. 물론 구역마다 다른 디테일들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말이다. 입장료도 저렴하고 가는 방법도 어렵지 않았지만 찬찬 유적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찬찬 유적은 사실 굉장히 넓은 범위로 분포해 있는 유적이고, 아직도 개발되지 않은 지역이 엄청 많은데도 불구하고 개발된 부분의 지극히 일부분만 공개한다는 것. 아마 발굴 상태가 양호한 곳만 공개하는 것이겠지만 페루 정부 측에서 마추픽추에 쓰는 신경을 조금만 나눠주면 천천히 둘러봐도 금방 끝나는 찬찬은 되지 않을 것이다. 오는 수고에 비해서 볼거리는 조금 적어 아쉬웠달까.
찬찬을 보고 남은 시간에는 완차코 해변을 가보기로 했다. 서퍼들의 성지라고 불리길래 아름다울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았다. 파도가 엄청나게 강해서 붙여진 별명 같았다. 몇몇 여행자들이 배구공으로 공놀이를 하고 있길래 빤히 쳐다보니 나도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졸지에 공놀이에 밥까지 함께 먹었다. 이름도 듣지도 않고 어디에서 온지도 듣지 않고 어울리는 이 모습이 얼마만인지. 배낭여행자라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겠지.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에 서핑하러 간다는 그들과 헤어져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돌아오는 길 해변에 있던 하얀 차가 있었다. 안에 있던 부부가 행복한 표정으로 바다를 보고 있었다. 아마 여긴 저렇게 천천히 봐야 하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숙소를 하루 더 연장했다.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와라즈에서 시간을 더 보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것도 이제 가책 없이 잘하는 편이지만. 낮에는 이동 방법을 확인 해 두다가 밤에 잠깐 산책이나 하고 나갔더니 사람들이 엄청 몰려있었다. 프리마베라, 그러니까 축제가 열려서 가두행진과 더불어 이곳저곳에서 음식도 팔고 재밌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왜 하는 거냐고 스페인어로 물어도 이유를 이해할 수 없는 나 자신을 한탄해야 했지만, 어쨌든 신기한 광경에 한참을 거리에 머물러서 그 모습을 봤다. 배가 고파져 길거리를 조금 벗어나니 음식이 넘쳐흐르니 바뇨스 생각이 또 절실히 난다. 한 가게에서 간단한 요리를 시켜 먹고 있는데 동양인인 내가 신기한지 어디서 왔고, 뭐하는 애냐며 질문을 한다. 페루 원주민 가족이었는데, 사진도 찍고 거기서 먹은 밥과 차도 공짜로 대접해 주셨다. 페루에 온 걸 환영한다며. 페루의 첫 목적지에서 얻어걸린 이런 행복한 시간들 때문에 페루의 시작이 아주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