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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화 May 23. 2022

어머니의 인생소풍

지난 5월 11일 수요일 제주에 계신 어머니께서

일어나지 못해 119로 병원에 가셨다고 했다.

지난 5월 8일 어버이날에
어머니께 전화로 인사드렸을때
어머니는 늘 같은 말이었다.

'너희들은 다 괜찮니?
탁이아방(당신의 큰아들)은 엊그제 동네잔치 있어 다녀갔고
아주망(당신의 큰 며느리)은 어제 왔다갔져.
오늘 경로당 갔다왔더니 서귀포(당신 둘째딸)에서 자리물회 물만 부우면 먹을 수 있게 양념핸 갔다났쩌.
한그릇 물탕 먹었쪄.
니네만 잘 이시민 됐쪄게.
난 밥맛은 이성 막 먹어졈신디 다리가 잘 걸어지진 못해부난 살만 쪙 큰일이여게.'

그래 여전히 잘 계시구나하고 여겼었다.

어머니는 올해 95세
그동안 혼자 식사도 해 드시고
낮에는 경로당에 가서 자전거도 열심히 타시고
그래서 늘 건강하게 살고 계시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못 일어나셨다 하니 걱정이 되었다.

대학병원 집중 치료실에서 치료하면서
이런 저런 검사를 진행 중이고
집중 치료실에서 면회도 안되니
좀 기다리려보자 해서 기다렸다.

여러가지 검사결과
뇌경색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5월 19일 화요일
집중치료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긴다고 해서
수요일 나는 짐을 싸고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내려갔다.

병원으로 직행 어머니를 뵈었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 눈을 번쩍 뜨시면서 응하는 반응을 보이셨다.
얼굴을 뵈니 4월에 뵀을때랑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 것 처럼 보였다.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머니가 병원가셨다는 말을 들은 후 몸은 세종에 있었지만 마음은 갈피를 못잡았는데 얼굴을 직접 뵈니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연세가 연세인지라 근육도 빠져나가고
힘도 없으셔서 누워계셨다.
호흡은 제대로 하고 계시고 식사는 아직 콧줄로 유동식을 드시고 계셨다.
오후에 보청기를 끼워드리고 말을 걸어보았다.
당신 이름은 아시는데 곁에 있는 나를 모르겠다고 하신다.
그동안 말을 못하신고 들었는데 말은 하시고
아까는 딸을 알아보는 것 같아 좋아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인지능력이 떨어지신 것 같다.
이대로 나한테 미소한번 보여주지 않으시고
어머니가 인생소풍을 끝내시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꺼이꺼이 목 놓아 울 것이다.

뇌경색이 더 이상 진전되지 않도록 예방치료를 진행중이고 수치를 보면서 상태가 좋아지면 재활 치료도 하실 계획이라고 담당 간호사가 말했다.

나는 올해부터 시간적인 여유가 생겨 어머니와 더 자주 시간을 갖기로 마음먹고 한달에 한번 제주로 내려가 어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을 갖는 중이었다.

3월과 4월 딱 두번 그런 시간을 가졌을 뿐이었다.

3월에 을 때는
어머니가 가 보고 싶어했던
마을 웟동네 영남동을 같이 둘러봤다.
어머니가 젊었을 감귤과수원을 운영하기 전에

매일 일하러 다녔던 곳이었다.
마을에서 자동차로 20분이 넘게 가는 거리였다.
이렇게 먼거리였나 싶었다.
이 먼 거리를 어머니는 매일 왕복을 하셨다.
그러니 동트기 전에 집을 나서
어둠이 짙어져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 이곳에서 일하며 젊음을 보내셨다.

그리고 어머니가 일년에 한번 촛불을 켜고 치성을 드리러 다녔던 산방굴사를 찾았다.
물론 지금은 산방굴사를 오를 여력이 안되시니 근처에 노랗게 피어있는 유채꽃밭에서 사진을 찍어드렸다.
유채꽃밭에 들어가려면 몇천원 내야하는데 할머니니까 그냥 들어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노란 유채꽃밭속에서 꽃보다 빛나는 어머니 인생을 보았다. 유채꽃밭속에 앉아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애잔하게 느껴졌다.

4월 제주방문 때는 어머니와 빙떡을 만들었다.
나는 나의 어머니를 빙떡의 장인이시라고  생각하기에 어머니 빙떡 만드는 법을 제대로 전수받고 싶었다.
어머니가 메밀가루랑 무우채를 미리 다 준비해 두셨다.
어머니와 같이 빙떡 반죽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반죽이 빙떡을 우한다고 말씀하신다.
물이 많아도 안되고 적어도 안되고 그렇게 해서 젖기를 몇십분간 해야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동네 큰 일이 있을때 빙떡만드는 일에 불려다녔던 이야기를 하셨다. 그야말로 빙떡은 어머니가 최고라면서 꼭 어머니를 모셔갔다고 하셨다. 그 양이 가늠이 안되지만 예전에는 동네 큰 일 집에 메밀가루 서말씩 빙떡을 만들려면 어머니만 초대되었다고 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지금 같으면 '장인들의 세상'에 초대될 그럴 분이시다.
나는 어머니를 빙떡의 장인 반열에 올려 드린다.

그렇게 두번 어머니와 함께하며
어머니가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이야기 들어 드리며
어머니와의 추억을 쌓아가던 중이었다.

그리고 6월초에 제주 방문 일정이 있어
5월은 건너뛰려 했는데
어머니가 부르신 셈이었다.

내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더 강인하셨다.
종손집에 시집와 한달에 한번 꼴로 기제사 지내시고
매달 마을 여드레당(제주에는 당오백 절오백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마을에 당과 절이 않았다. 여드레당은 매달 음력 8일 마을주민들이 치성드리는 곳)에 가서 치성을 드리시고 일년에 한번은 산방산에 있는 산방굴사에 가서 촛불을 고 밤새 기도를 하고 어느 자식 촛불은 곧게 잘 타오르는데 어느 자식 촛불은 자주 커지려 하드라면서 자식 걱정을 하셨다. 우리집 밥상은 보리밥이여도 치성드리러 가는 바구니에는 항상 곤밥(제주에서는 쌀밥을 곤밥이라고 함)과 솔라니(옥돔의 제주어)가 들어 있었다. 청소년기에는 나는 이런 어머니가 싫었었다. 집에 먹을 것도 모자란데 쓸데없는데 정성을 쏟는다고 말이다. 대학다닐 때는 이런 일로 엄마와 딸이 갈등을 겪는 것을 모티브로 소설까지 써서 대학 신문사 소설공모에 응모도 했었다. 그 소설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모티브는 기억난다. 지금 생각하면 사춘기에 치기를 부렸던 건 아닌가 싶다.
연세드시고 나서는 교리공부하시고 안나라는 세례명도 받으셨다.

나에게 어머니는
늘 그리운 존재
기다리는 존재였다.

어머니의 노동은 365일 쉬는 날이 없으셨다.
이른 새벽에 일을 나가시면 어둠이 짙어야 돌아오셨다.
내가 하는 일은 물을 따뜻하게 데워 어머니가 돌아오시면 바로 발을 씻을 수 있도록 세수대야를 준비하고 저녁에는 늘 그렇게 어머니를 기다렸다. 이런 어린 시절 추억때문인지 가끔은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는 엄마에게 아무런 반응이 없는 시댁집안 분위기에 가끔 화가 나기도 했었다.
그렇게 육남매를 키우셨다. 특히 나를 더 키우셨다.
그당시만 해도 우리 마을은 시골동네라 딸을 대학보내는 집이 거의 없었다. 아니 우리 또래가 처음이었다. 어머니는 딸 대학보낸다고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딸인 나를 대학에 다닐 수 있게 하셨으니 말이다.

70대까지도 마을에 채소 수집상이 있어 오일장이 있는 하루 전날에는 선별작업도 하시며 남는 감자, 양파, 당근 등의 파치들은 서울로 올려보냈다. 감귤철이면 과수원은 임대 주어도 당신 자식들이 먹을 나무는 남겨놓으시고 해마다 귤을 수확해 따박따박 서울로 올려보내셨다. 외손자가 귤을 너무 좋아하시는 걸 아시니 외손자 생각하며 꼭꼭 보내주셨다.

나이들어서는 각종 연금도 받으시고 자녀가 주는 용돈도 통장에 쌓여가니 일을 하지 않아도 이렇게 통장에 돈이 들어온다면서 좋은 세상이라고 늘 기뻐하셨다.

백수를 바라보는 연세임에도 놀고 있는 땅을 보시면 가만 계시지 않으셨다. 배추며 무우, 부추, 마늘, 콩 등 온갖 채소들을 과수원 모퉁이에 심으셨다. 지난 가을 갔을때는 직접 기른 배추 쉰포기로 김장을 하고 계셨다. 자식들 준다고. 3월에 갔을땐 한창 자란 쪽파를 바라보시면서 작년에 참깨농사가 잘 되었다면서 빨리 쪽파를 뽑아야 참깨를 심는다고 하셨다.

마을 경로당을 가시지만 늘 어머니 당신이 제일 나이가 많으시다면서 친구분들이 없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싶기도 하다.


안식년을 맞은 나한테는 그동안 일하고 살았는데
앞으로 그 많은 시간 뭐하며 지낼꺼냐고 물으셨다.
어머니는 평생 일하고 지내셨으니 일안하면 뭐하고 사는지 그 방법을 모르시는 게 당연하다.

명절때 손주손녀들에게 용돈을 후하게 주시는 할머니시다.
손자들 대학갈때 등록금에 보테라고 용돈도 주신다.
흠이라면
아들딸 차별하시는 점은 못마땅한 부분이다.
언젠가는 오빠네 조카와 언니네 조카가 대학을 동시에 들어가게 되어 어머니께서 봉투를 두개 준비하셨는데 그 봉투가 바뀌어 갔다.
그래서 금액이 차이난 걸 알았다는.
언니는 섭섭했을 것이다.
그건 조상 모시는것을 제일로 알고 사신 분이니까
아들을 선호하실 수 밖에 없지 않나하고 나는 이해하고 넘어간다.

어머니의 인생소풍,
내 어머니는 소풍 끝나는 날
어떤 마음으로 떠나실까!
희노애락 중에
'즐거웠노라
행복했노라'

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인생 소풍을 더 즐기시고 떠나실 수 있도록
시간을 허락해 주십사라는 기도를 드린다.

병원에 계신지 열흘이 되어가는
5월 20일 금요일
몸은 누워 있어도
내가 구누냐고 물으니 내 이름을 말하시며
흐뭇하게 미소도 지으신다.
그 미소는 나도 미소 짓게 만드는 미소이다.
그 미소를 오래오래 간직하며 살고 싶다.

어머니!
그 미소를
더 자주
더 오래

보여 주세요.

95세 어머니 손, 마디마디주름살이 짙지만 고운손!

#인생소풍 #어머니 #빙떡 #당오백절오백 #희노애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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