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에프 퇴사기
누구나 추억이 있다. 추억은 살아갈 힘이 되기도 하고 때론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저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 남았을지도 모를 기억이 추억으로써 존재하는 건 아쉬움 때문일지 모른다. 그래 어쩌면 우리는 추억이 아닌 아쉬움을 먹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신입사원 근속연수는 2년 정도라고 한다. 최근 개발자 근속 연수는 2년도 채 안 된다고 한다. 4년. 현재 내 커리어에서 4년은 무려 30%에 달하는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리고 4년은 아쉬움을 남기기에. 그렇게 추억이 되기에. 썩 충분한 시간이다.
6개월 만에 블로그를 켜는 오늘은 내 지난 4년의 아쉬움에 관해, 내 추억에 관해 끈적하게 남겨볼까 한다.
오세용닷컴 블로그에서 좀 더 이쁘게 보실 수 있습니다.
2019년, 코드에프에 합류했다. 나는 코드에프의 3가지 이름과 함께했지만 이 글에서는 모두 코드에프라 표현하겠다.
20명 정도가 앉아있던 서울 영등포 어딘가. 좋은 기억을 남긴 옛 동료들은 나를 반갑게 맞아줬다. 1년 여 기자 생활을 하며 개발을 잠시 놓았지만 이들은 나와의 경험을 떠올리며 기꺼이 기회를 줬다. 그렇게 개발자 출신 기자는 다시 본래의 자리인 개발자로 돌아왔다.
내가 속한 곳은 코드에프TF 개발팀. 개발자 3명 중 한 명으로 익숙지 않은 스프링과 앵귤러를 다뤄야 했다. 만 6년을 모바일 개발자로 살아온 내게 풀스택을 지향하는 개발팀은 큰 도전 과제였다. 더욱이 상용 API를 만드는 팀이라니. 구독형 서비스를 만드는 팀이라니. 내게 이보다 좋은 기회가 있을까 싶어 두근댔다.
개발자를 떠났던 내가 다시 돌아오는 걸 보며 누군가는 비아냥댔다. 개발이 우습냐 묻더라. 그 말 때문이라도 나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모바일 개발자 경험을 가지고 백엔드 개발자라니. 이런 내 커리어에도 나는 팀에서 존중받으며 일했다. 그 존중 때문이라도 나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개발자 출신이랍시고 개기자라며 필드를 누빌 때도 마음 한 켠에는 나는 그다지 대단한 기술력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 생각 때문이라도 나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집을 회사 근처로 옮겼다. 덕분에 출퇴근 시간은 온전히 내 잉여 시간이 됐다.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밤에 남아 기술서를 읽었다. 모바일 개발자로는 어찌어찌 일을 해냈는데 스택이 바뀌니 영 힘을 못 썼다. 열심히 하면 잘 하게 되겠지. 그 마음으로 그저 열심히 했다. 개발자로는 계속 그렇게 살았었으니까.
스스로 부족함이 걸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라도 하고자 했다. 팀 내 전문 QA가 없으니 다년간 SI 경력을 살려 QA를 빡쎄게 했다. 팀 내 전문 테크니컬 라이터가 없으니 기자 경력을 살려 API 개발가이드를 썼다. 코드에프는 초기부터 비즈니스에 의견을 낼 기회가 있었다. 짧은 창업 경력을 살려 이것저것 아이디어도 냈다. 조직에 비효율이 보이기 시작하고서는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것을 적용했다. 이때부터 협업 도구며 업무 절차며 스프린트며 하나씩 조직에 의견을 냈다.
그렇게 2019년을 보내며 나는 가장 잘한 것 3가지 중 단연 첫 번째로 ‘개발자로 돌아온 것’이라 썼다. 그저 컴퓨터를 좋아하다 어찌어찌 개발자가 됐지만. 그런대로 나는 개발자라는 포지션을 좋아했나 보다.
2019년 코드에프는 내게 다시 개발자로 돌아올 기회를 준 조직이다.
2019년 아쉬운 것 하나를 꼽자면 좀 더 프로그래밍에 시간을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 분명 많은 시간을 코딩에 할애했지만 되돌아보면 그때가 유일하게 코딩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2020년은 내 커리어에서 가장 안정적이었다. 회사 5분 거리에 집을 얻으며 출퇴근 시간을 영어 공부와 독서, 운동 등으로 채웠다. 그래도 시간이 많이 남았고 개발 공부에 사용했다. 글도 많이 썼다. 그래도 에너지가 남았는지 <스튜북스>를 창업해 책을 내고, 비즈니스 미디어 <와레버스>를 키우기도 했다. 2023년에도 이어지는 투자소모임도 이때 만들었으니 안정적인 조직이 주는 장점을 제대로 누렸다 생각한다.
코드에프 API는 안정적으로 성장했고 우리는 이 사업이 앞으로 잘될 거라 믿었다. 구성원은 각자 맡은 바 역할을 해냈고 한 방향으로 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이 팀이 좋았다.
나는 이 조직을 효율적으로 만들어 앞으로 더 큰 성장이 가능하도록 돕고 싶었다. 이에 협업 도구를 제안하고 시스템을 만드는 등 조직의 기반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당시 리더들은 내 의견을 수용했고 이 일련의 작업을 내게 맡기는 믿음을 보여줬다.
나는 협업 도구 노션을 활용해 10명 코드에프TF에 적용했고 이 적용 과정을 블로그에 연재했다. 그리고 몇몇 곳에서 발표를 진행했고 한국 노션 공식 웨비나에서도 발표할 기회를 얻었다. 이때는 정말 이 활동들이 이후에 어떻게 이어질지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개발자로서는 프론트엔드 Vue.js 코딩에 시간을 많이 할애한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서비스가 알려지며 내부 운영을 위한 어드민 페이지가 필요했다. 그때까지 우리는 이메일과 유선으로 고객 대응을 처리했는데 다소 비효율적이었다. 이에 우리는 어드민을 만들어 고객 대응을 효율화하기로 했다.
당시 나는 어드민 페이지를 개발했고 프론트엔드 개발을 본격 맛봤다. 자바스크립트는 나를 꽤 괴롭혔는데 자바에 익숙했던 내게 자바스크립트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언어였다. 어쨌거나 프론트엔드 개발을 공부하며 어드민 페이지를 만들고 이후 고도화하는 데도 많은 아이디어를 냈다.
특히 이때 설계된 Q&A 시스템은 내가 퇴사 할 때까지도 사용됐는데 홈페이지에서 고객이 Q&A 게시글을 올리면 API팀 팀원에게 순차 할당되고, 어드민에서 댓글을 달면 고객에게 이메일이 발송되는 등의 고객 대응을 위한 시스템이었다. 이 시스템으로 인해 이후에도 많은 시간을 아꼈다. 뿐만아니라 사내 다른 팀과의 협업을 위해 별도 이메일 문의를 하던 것을 어드민 내에서 메일을 보내고 수신할 수 있도록 했다. 어쨌거나 API 운영 시스템에 관한 설계에 참여한 것은 좋은 경험이었다.
또한 구성원을 하나, 둘 더 채용하기도 했는데 당시 유행했던 노션을 활용한 채용 페이지도 만들었고 실제 개발자 채용을 하기도 했다. 브랜딩에도 신경 썼는데 구성원을 인터뷰하기도 하고 보도자료를 써서 배포하기도 했다. 기자 경험은 유용히 사용됐고 개발 외에도 여러 분야에 기여할 수 있는 스타트업 코드에프가 좋았다.
협업 도구부터 시작해 어드민 시스템과 브랜딩 등 다양한 곳에 기여하며, 비록 지분은 없지만 나는 코드에프가 내 회사라고 생각하고 다녔다.
2020년 아쉬운 것을 하나 꼽자면 어렵게 만들었던 루틴을 코로나 앞에 너무 쉽게 포기한 것이다. 출퇴근 10분 컷은 정말 너무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2021년은 코드에프가 사실상 다시 만들어진 해다. 기존 경영진이 퇴임하며 이사진이 새로운 공동 대표로 취임했다. 이들은 젊었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 의지와 에너지가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새로운 코드에프가 기대됐다.
2021년은 조직을 재정비하는 한편 확장도 병행했던 시기다. 개발자를 2배로 늘렸고 기획, 디자인 등 제품 직군 전체가 늘어났다. 사업군도 확장했는데 코드에프 API 외 신사업 그리고 마이데이터 본허가를 취득하며 본격 핀테크 회사로 자리매김했다.
이 과정에서 조직은 더 늘었고 나는 조직 내에서 시니어로 분류되며 개발 팀장이 됐다.
API팀 개발 팀장은 다양한 과제를 부여받았다. 먼저 24시간 365일 운영되는 코드에프 API 서비스의 기술적인 문제를 담당했다. 이미 코드에프 API를 활용해 운영되는 상용 서비스가 많았고 기존 고객 대부분을 유지한 채 신규 고객사가 지속 증가했다. 초기부터 함께한 서비스의 지속된 성장을 경험하며 개발 팀장이라는 자리가 탐이 났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팀장이 되고 나니 내 생각과 다른 게 많았다.
먼저 업무량이다. 24시간 365일 운영한다는 건 생각보다 굉장한 무게감을 갖는다. 어쨌든 팀장이 됐으니 기존 팀장의 역할을 모두 가져오기 위해 노력했는데 속도가 나지 않아 마음이 불편했다. 업무 시간은 어떻게든 커버하겠다만 업무 외 시간이 정말 문제였다. 퇴근 후는 물론 주말에도 API 서비스는 운영돼야 했고 사실상 이 역할은 개발 팀장의 몫이었다. 팀원일 때는 왜 몰랐을까 싶었던 부분이 많았다.
두 번째는 팀 관리다. 당시 API팀은 나를 제외하고 백엔드 개발자 2명, 프론트엔드 개발자 2명으로 구성됐다. 팀에서 관리하는 굵직한 웹서비스가 4개였고 개편 의지도 있었기에 프론트엔드 개발자를 줄일 수 없었다. 심지어 별도 퍼블리셔도 없으니 프론트엔드 개발자의 업무량이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API팀은 API 서비스를 운영하는 팀으로 API 서비스가 주된 상품이었다. 때문에 개발 팀장으로서 이 팀 구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깊었다.
결과적으로는 백엔드 개발자들이 제 몫을 해줬고 프론트엔드 개발자들은 프론트엔드 개발 외 팀을 위한 여러 업무까지 해줬다. 내 커리어 첫 팀원이었던 이 4명을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다. 고작 몇 살 더 많다는 이유로, 고작 몇 년 더 경험했다는 이유로 팀장이 된 나를 존중하며 함께해 준 당시 팀원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한다.
마지막으로는 팀 간 협업이다. 구성원이 두 배로 늘며 조직은 50명에 달했고 기존에 없던 문제들이 생겨났다. 업무량이 늘어나며 조직을 늘렸지만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조직은 혼란스러웠다. 누가 오너십을 가져야하는지 명확하지 않았고 누구의 역할도 아닌 회색 영역에서는 서로의 의견이 충돌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두의 의욕이 불타면 또 다른 문제를 낳기도 했다. 서로가 강하게 의견을 내다보니 때론 감정싸움이 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초보 팀장이던 나 역시 많은 실수를 했다. 어쨌거나 모두에게 필요한 성장통이었다.
단순히 의욕이 불탄 것이라면 언젠가 식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커리어 첫 팀장을 맡은 나는 몇 달이 흘러도 그 의욕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혹여나 나로 인해 서비스가 망가지면 어떡하지? 그래서 우리 고객 서비스에 영향을 미치면 어떡하지? 그래서 나로 인해 회사가 힘들어지면 어떡하지? 여러 우려 속에서 나를 가장 긴장하게 했던 건 내 팀원들이었다.
내가 부족한 팀장이라서 우리 팀이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는 거라면 어떡하지? 내가 부족한 팀장이라서 우리 서비스가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리고 내가 부족한 팀장이라서 우리 팀원들이 노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올바르게 성장하지 못해서, 좋은 커리어를 만들지 못하면 어떡하지?
매일 야근이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가장 먼저 출근했다. 주말에도 작업했고 언제나 온라인이었다. 나는 좋은 개발자이고 싶었고, 좋은 직원이고 싶었고 그렇게 코드에프에 기여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내 동기부여 중 가장 강력한 건 역시 내 팀원들. 나는 팀원들에게 좋은 팀장이 되고 싶었다.
좋은 팀장이라는 건 마치 첫사랑과 같이 애쓸수록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6개월이라는 짧았던 팀장 생활을 마쳤다.
2021년 아쉬운 것을 하나 꼽자면 좀 더 침착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등바등 애쓰는 것 한편으로 조금은 차분했더라면 실수를 줄이지 않았을까 싶다.
조직은 무섭게 성장했다. 경영진은 구성원을 더 충원하도록 요구했다. 전 조직이 구성원을 늘였고 팀 구조에 문제점을 파악하던 내게는 좋은 기회였다. 나는 구성원을 설득해 개발자 5명을 충원하게 됐다. 기존 5명에 5명을 더해 무려 10명이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 나는 팀 구조를 지속 고민했다. A안, B안, C안을 넘어 F안, G안도 만들었다.
고객이 지속 늘었기에 기존 맨파워가 아닌 시스템으로써 서비스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수작업으로 하던 업무를 어드민 UI로 할 수 있도록 설계했고, 데이터 변경 시마다 배포하던 서비스를 DB에서 조회하도록 설계했다. 여러 프로젝트를 설계하며 이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구성원을 충원하는 그림이었다.
2021년에도 그랬지만 2022년에는 정말 많은 이력서를 검토하고 인터뷰를 진행했다. 원래도 까탈스러운 성격은 팀원을 뽑기 위해 그야말로 매의 눈이 됐다. 그렇게 충원을 진행하며 나는 짧았던 개발 팀장의 커리어를 마치고 개발 부서장이 됐다.
개발 부서장이 됐지만 당장 해야 할 일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여전히 코드에프 API를 운영했다. 하지만 팀원을 충원하며 자원이 확보됐고 그동안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을 하나, 둘 바꿔갔다. API팀은 비로소 시스템화되기 시작했다.
부서장이 되며 어쨌든 직책이 더 높아졌다. 사실 조직 내에서 의견을 내고 행동하는 것은 초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팀원으로서 나를 만난 초기 멤버들과 부서장으로서 나를 만난 멤버들은 나를 다르게 받아들였다. 때문에 내가 어떻게 이들을 대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고민하기도 했다.
또한 2020년, 10명 TF때 도입한 협업 시스템은 조직이 어느새 100명을 향하며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에 경영진과 협의해 협업 위원회를 만들고 전사 협업 시스템을 재정비하는 프로젝트를 띄웠다. 마침 2021년에 집필한 도서 <팀장님, 우리도 협업 도구 쓸까요?>가 2022년에 출판되며 협업을 논하기에 적절한 배경이 됐다. 물론 출판 전과 후 내가 생각하는 내 언행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구성원이 늘어나며 하고 싶은 것을 정말 많이 했다. 협업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물론 사용 서비스에 내 아이디어를 적용하거나 이후 시스템 방향성을 결정하는 등 능력에 비해 과분한 기회를 얻었다. 결코 코드에프 API를 내가 홀로 주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아이디어를 정말 많이 녹일 수 있었고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경험치를 원하는 만큼 얻었다.
정말 좋은 동료들과 함께했다. 무엇보다 개발1부. 수천 개 이력서를 훑고 수십 명을 인터뷰하며 우리 팀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 생각한 5명을 뽑았다. 한 명, 한 명 머리로 그리고 마음으로 뽑았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가끔은 서로 다른 방향을 원하기도 했지만, 혹여나 그들이 이 글을 본다면 말하고 싶다. 이런저런 일을 모두 뒤로하고. 어쨌거나 나와 함께 개발1부에서 함께했던 우리 10명. 단지 그것 하나만으로 나는 여러분 모두가 정말 좋다. 그리고 고맙다.
점심시간마다 플레이스테이션으로 피파를 하며 동료들과 정말 많이 웃었다. 매주 독서소모임을 하며 진솔한 대화를 나누던 동료들도 있었다. 넓은 라운지에 모여 수다를 떨기도 하고 다양한 동료들 속에서 하루하루 웃음이 마를 날이 없었다. 나는 코드에프에서 함께한 내 동료들이 정말 좋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한 줌의 추억으로 변해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2022년 아쉬운 것을 하나 꼽자면 여유를 갖지 못했고 충분히 즐기지 못했던 것이다. 조직이 성장하는 과정에 늘 아등바등 더 잘하기 위한 고민만 했던 것 같다. 조금은 즐겨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2023년, 코드에프는 사라졌다. 아주 급하게 이렇다 할 예고도 없이 사라졌다. 당시의 충격은 내게 여전히 남아 있다. 사랑했던 것을 잃는 고통이라면 몇 차례 경험한 바 있지만 이 고통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마 평생 익숙해지지 않겠지.
대주주가 바뀌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지분 하나 없는 직원이었기에 경영적인 의사결정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간간히 들려오는 소문은 들었다만 갑작스럽게 진행될 줄이야. 대표가 사임했다. 새로운 대표가 취임했다. 자리에 앉아 멍하니 창가를 바라보는 것 외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전사 10% 인원을 관리하는 부서장이 이러한데 주니어들은 오죽했을까.
많이 바뀌었다. 한 주, 한 주 바뀌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렸다. 동료들이 울었다. 라운지에 앉아 엉엉 울었다. 분명 어제만 해도 같이 웃던 그 자리에서 우는 모습을 보니 화가 났다. 내가 좋아하는 동료들이 우는 게 너무 싫었다. 너무 아팠다.
그동안의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어리바리 합류했던 어느 2019년. 코드에프와 한 몸이 된 2020년. 책임감을 느끼며 조직을 만들던 2021년. 양어깨 무겁게 10명의 부서원과 함께하던 2022년. 그리고 모든 게 한 줌의 재로 사라진 2023년.
이미 벌어진 일. 돌이킬 수 없는 일. 심지어 내겐 발언권도 없는 이 일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런 일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생각하며, 다시는 겪지 않으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했다. 이 자본주의 시대에 이런 일을 겪지 않으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동료들과 다시 웃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꼭 그럴 순 없더라도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고 싶었다. 가능성. 그렇게 나는 어떤 가능성이 되어 보려 했다.
그렇게 나는 코드에프를 떠났다.
글쎄. 2023년 아쉬운 것이라. 내 동료들과 한 번이라도 더 말을 섞어볼 걸 하는 아쉬움.
어느 날 아침. 더운 날 밤새 낑낑대며 뒤척이다 땀 흘리며 깼다. 아직 알림이 울리지 않았는데 정신이 말똥말똥하다. 시간이 얼마나 됐나 했더니 알림까지 1분이 남았다. 그 순간 1분이 지나 알림이 울린다. 썩 끈적한 아침이다. 분명히 뽀송한 상태에서 누웠는데. 생각해보니 재미난 꿈을 꾼 것 같기도 한데. 충분히 잔 것 같은데 썩 개운하진 않다. 그래도 하루를 시작해야지.
4년 동안 꾼 꿈을 이야기 하라면 얼마나 할 수 있을까? 글쎄, 얼마 뒤 20분 강연을 해야 하는데 그것보다는 오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얼마 전 90분 강연을 했는데 그것보다는 오래할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허락한다면 조금 더 하고 싶기도 하다. 여러분이 원한다면 술을 좀 가져오련다. 사실, 다시 위스키를 마시기 시작했거든.
어떤 가능성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그런데 어떤 가능성이 되는 삶이라니 가슴이 썩 두근댄다. 어쩌면 오늘을 위해 지난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났는지 싶다. 여전히 함께하는 내 동료들을 보고 있자면 여전히 나와 함께 꿈꾸는 동료들을 보고 있자면. 어쩌면 가능성은 이미 현실이 됐는지 모른다.
6개월만에 열어본 블로그. 다음 글에서는 내가 어떤 가능성을 만들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지 나눠보련다.
뉴스레터를 시작했습니다. 제 다음 글이 궁금하시면 구독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