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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카치나 Jun 03. 2024

'일본인'이란 어디에서 온 걸까?

오구라 도시마루의 「절망의 유토피아」를 읽고

저자 : 오구라 도시마루(小倉利丸)

제목 : 절망의 유토피아(絶望のユートピア)

번역 : 김지영

출판사 : 푸른길

페이지 : 총 220쪽

출간 연도 : 2021. 11.

원저 출간 연도 : 2016. 10.

ISBN : 9788962919370

원저 ISBN : 9784866270142


    도야마대학교 경제학부 교수이며 반천황제 운동을 전개해 온 사회 운동가인 오구라 도시마루의 에세이집. 1991년부터 2015년까지 저자가 집필한 논문, 블로그 글, 연설문 등 다양한 형태의 글이 수록되어 있으며, 번역본은 원저에서 내셔널리즘과 천황제를 중심으로 6분의 1 정도를 발췌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상징천황제가 '일본인'이라는 개념을 형성해 온 교묘함, 그리고 이 교묘함이 냉전이 끝난 이후에 맞이한 위기에 관해 서술한다.


    일본의 전쟁에 대한 책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명확하게 다뤘어야 했지만, 종전과 거의 동시에 냉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미국은 지배층과 천황의 청산보다는 친미로 전향한 정권이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였고, 그 결과 전쟁 책임을 흐지부지한 평화헌법이 제정되며 천황은 권력을 잃은 '상징'으로서 연명하였다. 이후 표면적으로 정치성을 상실한 천황은 국민통합과 내셔널리즘의 재생산에 앞장섰다. 폭력과 책임을 배제한 채 희생과 평화만을 강조하였고, 전후의 경제적 풍요 아래에서 국민의 탈정치화와 '일본인'이라는 민족 중심의 사고방식에 앞장섰다. 교묘한 수사 아래에서 전쟁의 긍정과 자민족 중심주의는 천황과 지배 체제에 의해서 재생산되었다.

    그러나 냉전 종식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내셔널리즘이 지배 체제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수렴하지 않게 된다. 신자유주의 기조 아래 시장을 개방한 일본은 경제적 풍요를 잃어버렸고, 격차가 커지며 민족적 개념보다는 계급적 개념이 더욱 선명해졌다. 내셔널리즘은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 원인으로 외국인을 지목하는 증오를 동반한 배외주의에 가까워지는 중이다. 정치권 또한 이런 경향에 호응하며 타국과의 외교 및 영토 문제가 발생하고, 이런 마찰은 일본 경제의 시장을 줄이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대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를 제시하지 못하는 이상 변화가 일어나기는 힘들어 보인다. 비판은 이루어지고 있지만 창조력은 고갈된 상태이다.


    적어도 냉전 종식 이후의 내셔널리즘은 일본에만 한정되는 현상이 아니다. 경제 침체 아래 외국인에 적대적인 배외주의와 이에 호응하는 정치는 세계 각국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누가 자국민인지에 관한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른다. 일본인이란 누구인가? 이는 단순히 국적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외모, 혈통, 국적, 언어를 아우르는 튀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일본인' 사이에 섞일 수 있는 '일본인'스러운 사람만이 '일본인'에 속할 수 있다. 당연히 일본 민족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위기가 심해질수록 누가 아군인지 명확한 선 긋기가 요구된다.

    일본 내셔널리즘의 특이한 점은 경제 위기 이전에도 체제 유지 측면에서 적극적인 방안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일본은 한국 전쟁 특수로 경제 호황을 이루고 안보 조약을 통한 반공의 보루 역할을 대가로 미국의 보호를 보장받았다. 이에 대한 반발로 발생한 안보 투쟁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 채 사그라들었고, 극단적인 이상과 폭력으로 치달은 좌익은 자멸하고 만다. 혁명의 실패 이후 정치적 무관심은 퍼지며 이 사이를 채운 건 경제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 '일본인'이라는 집단의식이다.

    정치적 무관심 기조 아래에서도 친미 성향의 정치권에 대한 비판 의식과 적대감은 일본 사회에 은은하게 남아 있다. 문제는 친미에 대한 반감과 미국 자체에 대한 반감이 혼재되거나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나 베트남 전쟁 당시 일본의 역할을 생각하면 미국에 대한 적대감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이 적대감이 전쟁 책임까지 뿌옇게 만들며 피해자 의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일본산 창작물에서 우스꽝스럽고 사악하며 무능한 미국과 정의롭고 우월한 일본의 대비를 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정 장르에만 국한되지 않는 이러한 대비는 별다른 설명 없이 당연하다는 듯 작품 속에 나타나며 보는 사람을 당황하게 한다. 구체적인 정황을 모르는 바다 건너 소비자들은 이를 어이없게 받아들이고, 설사 맥락을 파악하더라도 이에 공감하기는 어렵다. 그나마 대다수가 우월감의 영역에 머무르지, 혐오까지 나아가지 않다는 점에서 문제 삼기보다는 매끄럽게 넘어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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