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마지막 날 시험 발표를 본 후, 공부와 전혀 관계없는 삶을 1개월간 살았다. 공부가 습관이 된 터라 슬슬 몸이 불안감을 느낀다. 습관적 공부라. 남들의 눈에는 좀 있어 보일 수도 있겠다만, 수험생에게는 그닥 달갑지 않은 현상이다. 그것은 곧 습관적 불합격, 습관적 실패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노션으로 공부 계획을 짜던 중 잠시 손을 놓았다. 작년에 봤던 전공책을 다시 봐야 한다는 생각. 작년에 내가 틀렸던 문제를 다시 풀어야 한다는 생각. 그런 생각이 갖는 무게감은 상당하여 성인 남성 하나를 짓누르게 만든다. 자연스레 '나는 왜 이 공부를 해야 할까?'와 같은 생각으로 넘어가게 된다. 수험생한테는 가장 생산성 낮은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지겹도록 많이 반복해 왔기에, 나는 이 생각들이 내 기억의 어디로 향할지도 예측할 수 있었다. 아마 4년 전, 대학 강의실의 기억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4년 전, 대학 강의실. 역사 교사를 지망하는 친구와 치킨을 뜯었다. 현실에 대한 감각은 아직 부족해도, 현실이 주는 압박은 둘 다 느낄 나이였다. 나는 그 친구에게 시답잖은 질문 - 식민지 근대화론과 자발적 발전론 중 어떤 것을 지지하나? - 을 던졌고, 친구는 잠깐 고민을 하다가 내게 답을 주었다. 그 답은 양자택일의 결과도, 한반도의 일제 강점기와도 관련이 없었다.
나는 역사를 통해 겸손함을 배운다고 생각해.
그 친구는 말을 탁월하게 잘 하는 편이었다. 그 말의 결론은 결국 내 질문에 대한 답이었지만, 나는 지금 시점에서 그 답이 딱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예비 교사로서 으레 생각해 보아야 할 지점 - '너의 교과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 을 나는 고민하지 않았던 점이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국어 교사를 지망하는 나는, 국어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고민해 본 적이 있었던가. 이때 이후로, 나는 공부를 하면서 '국어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자 노력했다.
다시 모니터 앞. 잠깐의 시간 동안 공부 계획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것들을 통해 난 무엇을 배울 수 있고,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주변에 이미 국어 교사가 된 친구들도 꽤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도 가능한 반영해 보려 노력했다. 내 수준에서는 굉장히 복잡한 고민이었다.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 문법, 문학. 언뜻 봐서는 크게 관련 없어 보이는 여러 과목이 '국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 앞에 놓일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하는 나는, 이것들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다고 설명해야 하는가. 이 질문의 답을 찾지 못한다면, 나는 임용시험 공부를 계속 할 필요성이 있을까? 부정적인 생각의 연속이었다.
'공감'보다는 정도가 약한 단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국어'로만 실현시키기에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존중'보다는 더 구체적인 단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는 '국어'가 아니어도 괜찮다. 교육학 교수들이 좋아하는 '잠재적 교육과정'으로도 실현할 수 있을 가치다. 한참을 고민하다 내가 조심스레 끌고 온 단어는 '이해'였다.
수많은 국어(교육) 전공책들 중에 '이해'라는 단어가 빠져 있는 전공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너'를 이해하기 위해 '듣고, 읽는다.' 나는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 '말하고, 쓴다.' '문학'을 통해 나는 작가를, 주인공을, 세상을 이해한다. '문법'은 더 정확한 이해를 위한 바탕이 된다. 이때의 '이해'는 단순한 '번역'과는 차이가 있다. 나와 본질적으로 다른 '너'의 말을 단순히 해석하는 것보다는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너'의 생각을, 철학을, 경험을 전부 고려해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너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이해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국어'라는 교과의 목적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아시다시피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나'와 '너'를 주어로 하는 말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X는 옳아.', 'X는 옳지 않아.'와 같은 말이 우선시되는 세상이다. 국어는 '올바름'을 판정해 주는 교과가 아니다. 국어는 '나'를 남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너'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교과라고 생각한다. '올바름'의 판정은 자라나는 학생들의 몫일 뿐이다. 국어 교사로서 나는 학생들이 서로를, 자신을,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과정 중에는 나의 생각을 학생들에게 강요할 필요도, '올바른' 생각을 주입할 필요도 없다.
안타깝게도, 몇몇 국어 교사들은 나와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무엇이 올바른지를 학생들에게 알려 주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동료 교사들, 혹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교사들은 '이해'의 대상이 아닌 지 오래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 꽤나 간극이 있어 보였다. 나라고 해서 교사가 되었다고 하여 성자와 같은 마음으로 모두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왕 내가 '이해'를 모토로 삼은 만큼, 내가 교사가 된다면 학생들을,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 정도는 최선을 다해 해보려고 한다.
다시 노션 앞으로 돌아왔다. 공부 계획을 세우기 귀찮다는 핑계로 별 잡스런 생각을 다 했네, 싶다.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정리했다는 기쁨보다는, 내년 2차 시험 때 쓸 소재를 마련했다는 점이 더 좋았다. 습관화된 실패의 결과가 사람을 이렇게 각박하게 만드는구나 싶다. 그래도, 진부하지만, 실패 속에서 무언가 얻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의 철없는 고민이 미래 어느 시점의 양분이 되기를 희망하며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