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쌍둥이 아빠다. 여느 부모처럼 아이들이 귀여운 행동을 하면 영상을 찍어 카톡으로 고향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께 보내드리곤 했다. 언젠가부터 어머니는 아이들 영상을 잘 보지 않으셨다. 가족들 단체 카톡 방에서 ‘1’이 없어지지 않고 오래도록 남아 있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농사일 때문에 바쁘셔서 그러겠거니 생각을 하고 넘기곤 했다. 한 번은 고향집에 내려가 어머니께 여쭤본 적이 있다.
“어머니, 애들 영상 보셨어요?”
“아니, 아직 못 봤구나.”
농사일도 사계절 계속 바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이해가 됐지만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서운한 마음을 들킬세라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어머니께 여쭤봤다.
“어머니, 아이들 영상 왜 잘 안 보세요?”
돌아온 대답에 나는 그다음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응... 눈이 아파서 핸드폰을 잘 볼 수가 없구나. 카톡 글씨를 보는 것도, 핸드폰 영상을 보는 것도.”
어머니 나이는 올해 67세이셨다. 해가 뜨기 전에 밭에 그리고 논에 나가셔서 해가 진 뒤 집으로 돌아오는 농부의 삶을 평생 사셨다. 어머니 손톱 밑은 흙이며 풀이며 곡식 찌꺼기로 항상 검게 물들어 있었다. 병원에서는 눈을 너무 혹사시킨 것이 눈이 나빠진 이유라 했다. 강렬한 햇볕에 눈을 너무 노출시켰고, 들판의 먼지들이 눈에 들어가 상처가 많이 났다는 것이다. 젊으셨을 때도 눈에 통증이 있기는 했지만 농사일을 계속해야 했기에 눈 건강의 빨간 신호들를 무시해오신 터였다. 눈이 아파서 눈을 잘 뜨지 못할 정도라고 말해도 병원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몇 번의 시술 끝에도 눈의 통증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씀에 죄송스러운 생각과 함께 마음이 부산해졌다. 나는 작가의 꿈을 갖고 있었다. 작가가 되면 꼭 쓰고 싶은 책이 있었다. 바로 ‘부모님의 자서전’. 한 작가가 말했다. ‘작가의 임무는 평범한 사람들을 살아있게 만들고 우리가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라고. 나의 부모님은 여느 부모님처럼 특별한 분들이었다. 단지, 그 특별함을 자식들에게 모두 쏟아부어 당신들 이름으로 특별함을 드러내지 못했을 뿐. 평생을 누구의 엄마로 아빠로 그리고 누구의 할머니로 할아버지로 살아오신 부모님. 한 평생을 자식을 위해 살아온 부모님께 조금이나마 당신들의 삶이 얼마나 특별했고 가치가 있었는지를 조명해드리고 싶었다. 그런 부푼 꿈을 안고 살고 있었는데 눈이 아파서 글자 보기가 힘드시다니...
‘풍수지탄’이라는 네 글자가 뒤통수를 쳤다.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 하나 바람은 멈추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려 하나 부모는 기다리지 않는다’는 그 뜻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부모님에 대한 글을 쓸 준비는 되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글을 써보기로 했다. 지금 쓰지 않으면 늦을 것 같아서. 완벽한 준비란 아마도 없을 것 같아서. 한 가지 믿을 구석은 있다. 우리 엄마, 아빠의 이야기를 가장 잘 쓸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부모님의 자식인 ‘나’라는 생각. 최소한 부모로서 당신들 삶에 대한 이야기는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 나는 자서전을 써본 적이 없다. 부모님의 일대기도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건 넉넉지 못한 농촌 살림에 억척같이 세 남매를 키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 그리고 세 남매가 성인이 되어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된 지금까지도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매일매일 노심초사하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를 알뿐이다.
대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 한 명의 고객을 위해서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맞춤형 수제품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 글은 칠십 평생을 자식의 껍닥(껍데기)으로 살아오신 아주 특별한 두 분께 바치는 글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우리 아이들도 이 글을 읽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얼마나 특별한 분들인지를 오래오래 기억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2021년 여름
부모님의 아들로 살아온 지
41년 7개월 열흘 째 되는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