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운증후군이 의심됩니다. 더 정확한 판정을 받고 싶으시다면 양수 검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특수학교, 차가운 사회적 시선, 마음의 상처, 평생 보살핌...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가슴도 답답했다. 아내는 흐느꼈고, 나는 담담한 척 말없이 아내를 토닥였다. 며칠이고 인터넷 검색을 하던 아내가 내게 말했다.
“나 양수 검사 안 받을래. 양수 뽑는 주삿바늘에 태아가 다칠 수도 있대. 확정 판정을 받는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우리는 그렇게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뱃속의 아이가 세상에 덜 상처 받고 살아가도록 앞으로 내 인생을 이 아이만을 위해서 살아야겠다고 조용히 다짐했다.
쌍둥이 임신 중 기형아 검사에서 이상 진단을 받은 이후 아내는 하루하루 우울한 날들을 보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아내의 비위를 맞췄다. 나는 슬퍼할 틈이 없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우울한 내색을 하면 아내는 순식간에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어머니 생각이 났다. 걱정하실까 봐 비밀로 하고 있었지만 나도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었다. 나 자신에 대한 위로와 태어나기 전부터 큰 짐을 지고 평생을 살아야 할 가엾은 아기에 대한 위로를 듣고 싶었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기형아 검사를 받았는데 이상 소견이 나왔다고 담담하게 말씀드렸다. 확실한 건 아니라고. 걱정 마시라고. 태연한 척했지만 나는 속으로 펑펑 울고 있었다.
‘엄마, 우리 아기 어떻게 해요? 불쌍한 우리 아기 어떡해요?’
30살이 넘도록 살면서 힘든 일이 있어서 어머니께 전화를 드린 건 처음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한답시고 17살에 집을 떠났다. 고등학교 때는 자취를 했고 대학교는 고시원에서 생활을 했다. 집을 떠나 오랜 타지 생활을 하면서 부딪히는 힘든 일들은 혼자 고민하고 해결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놀라시지 않도록 최대한 담담하게 검사 결과를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별일 없을 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어머니는 알고 계신 듯했다. 웬만해선 힘든 이야기를 안 하는 아들이 전화 한 이유를. 그리고 들으셨을 것이다. 담담한 말들 뒤에 숨어서 흐느끼고 있는 막둥이의 울음소리를. 짧은 전화 통화였지만 어머니의 ‘토닥토닥’은 불안했던 내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충분했다.
하늘은 무심하기도 하지.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던 우리 부부에게 또 문제가 터졌다. 출산이 두 달쯤 남은 어느 날. 태아 건강 검진 결과 한 아이의 성장이 멈췄다는 것이다. 다운증후군이 의심된다는 첫째였다. 둘째는 정상적으로 자라고 있지만 이대로 두면 둘 다 생명이 위험하다고 했다. 조기분만을 해서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는 의사. 다음날 바로 병원에 입원을 했다. 와이프는 병원에 입원해서 열흘 동안 쌍둥이들을 뱃속에서 더 품었다. 그리고 출산. 첫째는 1.3kg, 둘째는 2.2kg. 건강한 아이들은 보통 3kg 정도로 태어나는데 우리 쌍둥이들은 그 건강을 1/3, 2/3씩 나눠서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하늘이 도우셨을까. 첫째가 다운증후군 가능성이 높다는 의사의 진단은 오진이었다. 몸집은 작았지만 첫째는 정상이었다.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마음도 잠시, 손바닥 만한 크기의 첫째는 온몸에 주삿바늘을 꽂은 채 두 달을 인큐베이터 속에 갇혔다. 아내는 아이 온몸에 바늘 꽂은 그 모습을 볼 수 없다며 병원에 오지 못했다. 하루 면회 가능시간은 30분. 나는 매일 저녁 인큐베이터 앞에서 ‘섬집 아이’ 자장가를 불러줬다. 집에 돌아올 때는 아빠, 엄마 아들로 세상에 찾아와 줘서 고맙다는 말을 속삭였다. 어떤 말이라도 한 마디 더 보태서 아이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
인큐베이터 속 손주를 보기 위해 시골에 계신 어머니도 병원에 오셨다. 어머니는 인큐베이터 가까이에 대고 기도하시듯 무언가를 중얼거리셨다. 그리고 간호사를 불러다가 인큐베이터 속 아이가 팔이 불편할 것 같다며 자세를 바르게 눕혀 달라는 말씀 하셨다. 아이를 키워 본 적 없는 초보 아빠는 알 수 없는 디테일이었다. 아이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노래를 불러주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일 먼저 챙겨야 할 것은 인큐베이터 속 아이가 불편한 점이 없는지를 살피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초보 아빠에게 육아가 무엇인지를 그렇게 가르쳐주고 계셨다.
어느새 9살이 된 쌍둥이. 인큐베이터에서 두 달을 보냈던 첫째는 또래보다는 왜소한 편이지만 별문제 없이 건강히 자라고 있다. 건강히 자라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저 감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엄마’라고 불렀을 때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 의미를 어렴풋이 알 듯했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말이 절실히 다가온다.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기르고... 누구나 당연히 하는 평범한 일들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부모가 돼보니 건강하게 임신하고, 건강하게 출산하고, 무탈하게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것은 큰 복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이든 보이지 않든 항상 ‘엄마(할머니)’가 함께 있었다.
엄마!
엄마!
엄마!
그냥 불러보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