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두 개의 ‘집’이 있다. 집이 ‘두 채’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는 현재 아이들과 거주하고 있는 주민등록상의 집, 다른 하나는 고향의 부모님께서 살고 계신 집. 나는 두 집을 모두 ‘우리 집’이라 부른다. 물론 이 표현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네 집에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OO(친구 이름)네 집이죠?”
전화를 받으신 친구 아버지는 단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OO(친구 이름)네 집 아니다. OO(친구 이름) 아빠네 집이다!”
팩트 폭격! 당황스러웠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친구 아버지는 동의하지 않으실 수 있지만 어쨌든 나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 집을 ‘우리 집’이라 부른다.
우리 집은 나의 몸과 마음을 충전 시켜주는 ‘안식처’였다.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집을 떠나 학교를 다니다 주말에 한 번씩 집에 내려가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집에는 엄마가 해준 밥이 있었다. 또, 아무 생각 없이 방바닥과 한 몸이 되어 하루 종일 뒹굴방굴 할 수 있었다. 재수학원 시절, 공무원 수험생 시절, 직장 새내기로 한참 사회적응을 하던 시절, 일상에 지쳐 충전과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내가 찾은 곳은 ‘우리 집’이었다.
집이 좋았던 이유는 그곳에 ‘엄마와 아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아무런 평가 없이 아무런 목적 없이 그냥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한없이 사랑을 주시는 당신들이 그 곳에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우리 집은 ‘엄마와 아빠가 있는 곳’이다. 우리 아이들이 지금 자신들이 사는 곳을 ‘우리 집’이라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자식들은 부모님이 사는 곳을 곧잘 ‘우리 집’이라 말한다. 하지만 어느 부모도 자식이 사는 곳을 ‘우리 집’이라 부르는 사람은 없다. 자식이 사는 곳은 부모님의 집이 주는 ‘안식’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자식이 사는 곳에는 부모님의 부모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부모는 껍닥’이라고 말씀하셨다. 껍닥(껍질)은 단순히 알맹이를 싸고 있는 표피가 아니다. 껍닥은 알맹이가 다 자라서 본연의 기능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보호하고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안식처다. 그래서 껍닥은 알맹이의 집이다.
어렸을 적 자식들은 ‘엄마와 아빠의 품’이라는 집에서 산다. 성인이 된 후에는 엄마와 아빠가 당신들의 삶으로서 가르쳐 준 ‘인생관’이라는 틀 속의 집에서 산다. 라면을 하나 끓이더라도 엄마가 했던 방식을 떠올리는 것처럼. 그리고 부모님이 멀리 떠나신 후에는 당신들과의 '추억의 집'에서 당신들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들의 영원한 집’이다.
혹시나 ‘껍닥 인생’이 소멸되는 삶이라고 오해하여 헛헛해 할 수 있는 당신들께 부족한 글이나마 이 진실을 꼭 전해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말씀드리고 싶다.
당신들의 삶은 평범해 보였지만 누구보다 더 특별한 인생이라고. 그리고 당신들은 누군가에게는 ‘영원함’이라는 소중한 존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