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

by 오늘도 생각남

6살 적, 기억나는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코스모스 핀 담벼락 앞에 시무룩하고 짜증 난 표정이 담긴 내 얼굴. 그날 나의 감정도 기억난다. 어려웠던 시절, 엄마는 큰맘 먹고 예쁘다고 생각하신 원피스를 내게 입히셨다. 옷 색깔이 갈색이었다. 나는 어두운 색들을 싫어했다. 분홍색, 노란색, 주황색 같이 밝고 명랑한 색을 입고 싶었는데, 엄마는 단정하고 차분하고 소위 튀지 않는 것을 좋아하셨다. 난 단호히 입기 싫다고 했지만 엄마는 비싸게 산 옷이라며 시골 가서 어르신들 인사드려야 한다며 가는 길에 사진을 찍으셨다. 그날 이후, 내가 깨달은 것은 결정할 권한이 없다는 것과 어차피 결정될 일로 다투기 싫다는 거였다. 옷, 신발, 모든 스타일은 엄마가 정한 대로 따랐다. 그게 어느 순간 편했다. 엄마에게 맞춰주고, 엄마가 좋아하시는 모습. 나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이 일이 결정적 원인은 아니었겠지만, 다른 것도 그렇게 흘렀다. 어느새 좋아하는 것보다 암묵적 규율 사이에 선택 장애를 겪었고, 내가 고른 것에 대해선 자신감과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나의 학교 생활을 돌아보면 그저 맹목적 배움이었다. 고등학교 때, 나는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오른쪽 천장에 배달려 있는 텔레비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 안에 우리 친구들이 있었다. 자그마한 텔레비전 안에 갇혀 미동도 하지 않고, 죽었는데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출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꼭두각시 인형. 기계. 잭팟.


하고 싶은 게 뚜렷하지 않았기에 수도권 대학 진학 표를 방바닥에 펼쳐 놓고 점수에 맞는 학과를 찾았다. 무슨 공부를 하는지 모르지만 주변 어른들이 남들이 선호한다고 하는 공무원 길을 가라는 말에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당연히 대학생활에 정이 들지 않았고, 공부를 해도 재미가 없었다. 친구들은 과에 맞게 공무원 시험이나 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9급, 7급, 고시에 합격했다. 20년간 요구되는 대로 살았으면 됐지, 안 되겠다. 지금 하고 싶은 거 해보자. 앞길, 미래, 진로, 이딴 거 생각해보지 않고 과감히 맞지 않는 옷을 벗었다.


덜컥 생물학과에 전공 신청을 했다. 공대 수학을 공부하고 읽지도 못하는 영어책 ‘Biology(생물학)’를 들고 다니며, 실험실을 들락거렸다. 교수님들도 기이한 문과생을 유심히 주목했다. 한 교수님은 “대학원에 진학해서 법과 의학을 공부해. 법의학자가 되면 좋겠다.”라고 하셨다. 피만 보면 기겁하고 잔인하고 끔찍한 것을 쳐다보기도 싫어하는 나에게 말이다. 그보단 자연 다큐멘터리를 찍겠다고 생태학 대학원실을 들락거렸고, 논문도 썼다. 그 속에서 나는 한국에 있지만 이방인이 된 것 같았고, 과 학우들은 경계의 눈으로 바라봤다. 아니,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기도 했다. 융합이라는 것 또한 말이 좋지, 익숙했던 문사철 학문과는 전혀 다른 이공 과학계라는 가지는 굉장히 벅찬 일이었다. 어쭙잖은 3년 갖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전문가의 좁은 길은 한참을 더 가야 했다. 순수하고 진정성 있는 배움의 시간이었고, 무모하고 엉뚱한 도전으로 대학 생활을 마무리했다. 그 순간들을 기억하며 오랫동안 생물학 전공 서적들을 버리지 못했다.


언행일치란 삶의 철학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젊은 시절,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에 알게 됐다. 당시 내 신앙은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성경을 읽으면 됐지, 무엇이 더 필요한가였다. 그들은 20대였지만, 나와는 차원이 다른 세계와 성찰과 거룩한 근심을 하는 자들이었다. 죄의 쓰라린 괴로움과 회개, 아내와 남편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재정과 시간 관리, 이혼한 부모님 밑에서의 상처와 아픔, 치유…. 사람들이 갖는 갖가지 고통 가운데 신의 뜻을 찾는 것은 이상적이 아닌 현실에 뿌리 박힌 것들이었다. 그들의 믿음은 지식과 머리에 머물지 않았고, 삶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사실 거대한 바다의 물 한 방울에 지나지 않고 모래사장에 한 줌보다 못하다. 진정한 배움은 삶의 변화가 아니겠는가. 독행일치. 1,000권의 책을 읽기보다는 1권이라도 제대로 실천하기. 내가 이 책을 읽고 변화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저자에게 배워야 하는 부분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배움의 벽을 허물게 된 또 하나의 계기는 아이를 기르게 되었을 때였다. 태교음악, 다중지능, 학습지들, 전집, 교구, 소근육 발달, 감정코칭, 훈육, 언어, 창의체험 등등 엄마가 알아야 할 것이 산더미 같았다. 당연히 좋은 것을 넣어주면 좋은 것이 나오겠지. 다양한 것을 오감 자극하면 그만큼 느끼겠지. 나 또한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강의도 듣고 모임에도 참여하는 등 나름 할 만큼 했건만, 10년 동안 무엇을 가르쳤고,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다.


그러던 중, 한 권의 책으로 크게 도전받게 되었는데, [빼빼 가족 버스 몰고 세계여행(용감한 가족, 우여곡절 끝에 25개 국, 163개 도시를 달리다!)]이었다. 이들의 세계여행 도전기를 보며 배움이란 것은 학교과 학원이 아닌 ‘세상이 배움터’ 임을 깨달았다. [자녀 독립 프로젝트]의 저자 옥봉수 선생님 가정도 중고생 세 아이와 함께 1년 이상을 부대끼며 세계 여행을 다녀왔단다. 두 가정의 자녀들이 말하는 공통점은 ‘나'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입시와 취업과 스펙을 위한 배움이 아니라 소명과 비전, 타인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면서 길을 찾아갔다.

우리 가정은 결단을 내렸다. 첫째를 초등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왜 배우는 것인가. 배움이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어떻게 보여주어야 하는가. 그야말로 우리가 설계하기 나름인 배움을 시작했다. 배움의 즐거움. 배움의 연결. 배움의 빛을 향하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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