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퇴사합니다”
얼마 전 지인이 단톡방을 통해 ‘퇴사’를 알렸다. 마음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왕성하게 N잡 활동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잘 나가는 N 잡러였다.
그녀의 N잡의 씨앗은 '글쓰기'였다. 블로그에 글을 썼다. 단발성 글쓰기 공모전에 참여해서 간간이 용돈 벌이를 했다. 그러다 다음카카오의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그녀는 자칭 ‘브런치가 사랑한 작가’였다. 그녀가 글을 쓰는 족족 다음 메일 포털에 게시됐고 수십만 회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콘텐츠로 기획하는데도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브런치 작가 되는 법’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수요를 알아채 ‘브런치 작가 되기’ 온라인 강의를 열었다. 경험을 전자책으로 만드는 강의도 만들었다. ‘전자책은 콘텐츠의 씨앗’이라는 슬로건으로. 전자책 강의는 브런치 작가 되기 강의에서 파생되었다. 강의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의 스토리에 착안하여 새로운 강의를 기획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어느 경험 하나 허투루 보지 않았다. 꼬리에 꼬리를 물며 그녀의 경험은 새로운 기획으로 탄생했다. 그녀는 타고난 N 잡러였다.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그 책은 출간하기도 전에 2쇄를 찍는 기록을 세웠고, 베스트셀러에도 등극했다. 그녀는 ‘돈을 만드는 N 잡러의 사람을 모으는 기술’의 저자 최광미 작가다.
‘n 잡러’가 ‘N 잡러’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n 잡러의 인사이트를 배우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퇴사’를 선언한 것이다. 들어보니 본격적인 N 잡러의 활동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인 사정에 의한 ‘미필적 프리랜서 선언’이었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데미안’, 헤르만 헤세)
그녀의 갑작스러운 ‘퇴사’는 소설 ‘데미안’의 한 구절을 떠오르게 했다. 그녀가 N 잡러로서 날아오를 수 있게 세상이 그녀를 감싸고 있는 껍질을 깨뜨려주는 것처럼 보였다. 알에 금이 가고 껍질이 무너져내리는 과정이 슬로 모션으로 보였다. 장엄하고 숭고한 순간이었다.
그녀의 모습에서 문득 내가 보였다. ‘언젠가 내 껍질도 깨지는 순간이 올까?’ ‘나는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을까?’ ‘그 순간이 왔을 때 나는 어떤 심정일까?’ 그녀의 갑작스러운 ‘퇴사’ 통보는 내 마음을 흔들어 놨다. 그것은 ‘부캐가 본캐로 전환’되는 역사적인 순간을 생생하게 확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미필적 프리 선언’은 얼마 전 아홉 살 아들의 질문을 떠오르게 했다.
“아빠는 ‘맵 하는 남자’가 좋아요?”
카톡 프로필 문구를 보고 내게 물은 것이었다. 지금 나의 부캐는 ‘맵 하는 남자’다. 마인드맵을 통해 생각과 정보를 정리하고 가치를 발견해서 새로운 것을 기획한다는 의미에서 지은 퍼스널 브랜드였다. 아이는 ‘맵 하는 남자’라는 단어가 친숙했다. 카톡 프로필에서 뿐만 아니라 유튜브에서도 그 단어를 자주 접했다. 얼마 전부터 나는 ‘맵 하는 남자’라는 유튜브를 시작했다. 마인드맵을 통해 글을 쓰는 것을 넘어 영상을 제작하는 것에 도전한 것이다. 유튜브 영상을 만들면 아홉 살 쌍둥이 아들들에게 보여줬다.
“아빠가 만든 영상이야”
아이들에게 아빠는 마인드맵에 빠져 있는 사람, 마인드맵을 그려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나가 더 추가된 것이다. 마인드맵을 그려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는 사람.
아이들은 아빠가 10년 넘게 다닌 직장 이름은 알지 못했다. 아빠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빠의 부캐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맵 하는 남자!!
아이들이 나를 ‘맵 하는 남자’라고 불러 줬을 때 나를 둘러싸고 있는 본캐 껍질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최광미 작가가 퇴사를 통해 본캐의 껍질을 깨뜨리는 장면도 떠올랐다. 세상에는 나보다 마인드맵을 잘 그리는 사람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이미 마인드맵을 본캐(본업)로 삼아 잘 나가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세상에는 수많은 작가가 있다. 우리는 수많은 작가들에게 서열을 부여하지 않는다. 작가들은 자신만의 세계관과 스타일과 색깔로서 각자의 독자와 소통할 뿐이다. 마인드맵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마인드맵을 그려 그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들 역시 자기만의 스타일로 세상과 그리고 고객과 소통하면 되는 것이다. 꼭 누구보다 더 뛰어날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서사와 색깔을 가지만 그것으로 족하다. 그래서 나는 유일무이한 ‘맵 하는 남자’다.
본캐(직업)는 세상이 정해주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원했다기보다 세상의 규칙에 따라 살다 보니 어느새 현재의 본캐를 갖게 된 것이다. 부캐는 자신만이 정할 수 있다. 그래서 부캐는 내 안의 결핍과 욕망이 만들어 낸 ‘진짜 나’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정한 부캐를 남들이 알아줄 때, 그리고 나의 부캐를 불러줄 때 그 부캐는 껍질을 깨고 조금씩 본캐로 바뀌게 된다. 퇴사를 통해 부캐를 본캐로 바꾼 최광미 작가처럼. 그리고 아들들이 아빠의 본캐보다 부캐를 알아봐 준 나의 경우처럼.
나부터 나의 부캐를 불러주자. 그리고 남들이 내 부캐를 부를 수 있도록 알려주자. 그것이 ‘가마니 인생’을 살아온 내가 ‘진짜 내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찾은 방법이다.
돌아보니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를 통해 그 비밀을 이미 알려주고 있었다.
‘남들이 나의 부캐를 불러 주기 전에는
부캐는 다만
하나의 딴짓에 지나지 않았다.
남들이 나의 부캐를 불러주었을 때
부캐는 나에게로 와서
N잡의 씨앗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