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원래 ‘그런 사람’ 아닌데요.

바람이 분다. 마음이 분다.

by 오늘도 생각남

집에 환자가 있으면 가족이 더 고생이라고 한다. 다리 골절 사고가 난 지 35일. 움직이지 못하고 집에만 있는데 나보다 더 답답해 사람들이 있다. 바로 8살 쌍둥이들. 아빠가 몸으로 놀아주지 못하니 애들은 에너지 발산을 못해 몸을 근질근질해했다.

“아빠, 사우나 오징어 먹고 싶어요”


건이는 여행을 갈 때면 휴게소에 들러 꼭 ‘사우나 오징어’를 사 먹었다. 코로나로 아빠의 부상으로 여행을 가본 지가 오래된 만큼 건이가 사우나 오징어를 먹어본 것도 꽤 오래전이었다. 답답해하는 아들을 보며 아내가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그래, 사우나 오징어 사 먹으러 휴게소 가자.”


그렇게 급작스레 결정된 휴게소 여행(?). 집에서 가장 가까운 휴게소는 ‘금강 휴게소’였다. 휴게소에 가서 사우나 오징어도 사 먹고 점심도 먹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사우나 오징어 먹겠다고 휴게소를 가다니. 나는 목발을 챙겼다. 아직 뼈가 완전히 붙지 않아 발로 땅을 디딜 수 없었다. 골절 사고 후 목발을 짚고 나가는 첫 원거리 외출이었다.


휴게소에 도착. 휴게소 주차장에서 휴게소 실내까지는 천리길이었다. 목발에 의지해서 걷는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다 도착했나 싶었는데 열 칸 정도 되는 계단이 나타났다. 평평한 길을 찾을까 하다가 계단 오르기에 도전했다. 왼팔은 목발, 오른팔은 계단 난간을 짚고 한 칸씩 점프를 했다. 계단을 다 오르니 낑낑대며 계단을 오르는 내 모습을 사람들이 안타깝고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저 원래 그런 사람 아니에요. 다리 멀쩡했는데 잠시 골절로 목발 짚고 있는 거예요...’ 하는 변명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깁스를 하고 있을 때는 ‘일시적인 불편’처럼 보였는데 깁스를 풀고 목발만 하고 있으니 ‘무기한 불편 '처럼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 같았다.



‘저 원래 그런 사람 아니에요?’


원래 그런 사람? 내 안에서 맴도는 '구차한 변명'은 고등학교 시절 야간 자율학습 시간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나는 나름 ‘착한 학생’이었다.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선생님 말씀과 교칙은 잘 지켰다. 그때는 교칙을 어기면 뭔가 큰 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생각했었다. 고1 야자시간. 공부 잘하던 반장이 나와 다른 친구 한 명에게 ‘야자 땡땡이’를 제안했다. 지하 매점에 간식을 사 먹으러 가자는 것이었다. 매점은 쉬는 시간에 충분히 갈 수 있었다. 반장은 ‘야자 땡땡이’의 스릴을 맛보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애들은 야자 시간에 당구장도 가고 땡땡이 많이 치잖아. 우리는 그런 애들은 아니니까 한번 정도는 괜찮잖아”


달콤한 유혹이었다. '우리는 그런 애들은 아니다'라는 말은 조금 불편했다. 하지만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혼자는 못했지만 한 번은 해보고 싶은 '소심한 일탈'이었다. 매점을 다녀오는 길에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열면 안 된다고 믿었던 판도라 상자를 열었는데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은 그런 기분. 소심한 일탈은 완벽 범죄가 되지 못했다. 교실로 돌아오는 복도에서 학생주임 선생님과 딱 마주친 것이다. “이놈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맨날' 땡땡이나 치고...” 우리는 '맨날 땡땡이치는 불량학생'이 돼 있었다. ‘사랑의 매’로 머리를 한 대씩 맞고 야자시간이 끝날 때까지 복도에서 손을 들고 서있어야 했다. 우리 셋은 똑같은 눈빛으로 선생님을 바라봤다. '선생님, 억울해요. 저희 그런 학생 아니에요. 이번이 처음인데...'



고1 야자시간 첫 땡땡이에 성공하지 못하고 학생주임 선생님께 걸렸던 그 순간, 나는 '교칙을 어긴 불량 학생'이었다. 교칙을 어긴 현장범에게 과거의 성실함은 면책사유가 되지 못했다. 내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는 길은 과거의 성실함을 그대로 미래에 갖다 놓는 것뿐이었다. 물론 그 선생님께 보여주기 위해 성실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냥 원래 하던 대로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원래 다리가 아픈 사람이 아니에요'라는 변명도 생각해보면 부질없는 말이다. 지금 나는 발등 골절로 다리가 아픈 사람인 게 맞다. 과거에 아니었고, 미래에 아닐 것이라고 변명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설사 재활이 길어져서 목발을 짚고 다니는 기간이 길어지거나 또 다리가 부러져서 다시 목발을 짚고 다니더라도 그 사연을 사람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다. 사람들의 일시적인 시선이나 평가가 나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기때문에.


목발을 짚고 있는 현재의 나도, 튼튼한 두 발로 뛰어다니던 과거의 나도 모두 나다. 다리 부상으로 목발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서 나의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5만 원짜리 지폐가 조금 찢어졌다고 해서 그 가치가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가치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하는 내 마음뿐.


어느 맑은 봄날, 제자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바람이 흔들리는 것입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것은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나뭇가지도 바람도 아니다.
흔들리는 것은 네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