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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 Jun 19. 2024

#.36 패키지(PART.1)

Imagine, I'm aging


# 쳐들어왔다, 개 같은 여름이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최승자 시인은 자신의 시에서 가을을 이리 표현했더랬다. 나에게 '개 같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계절이라면?

여름, 바로 여름이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어김없이 여름이 찾아오면 하는 말.

"여름에 실체가 있다면 물어 죽일 거야."


더위를 워낙 많이 탄다. 땀도 많이 나서, 습하면 도무지 머리가 맑지 않아서 여름이 달갑지 않다.


녀석이 성큼 다가오는 6월. 6월 입사자인 나는 현직장에서 1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 말인즉슨, 모든 연차를 소진해야 한다는 말씀이렸다. 우리 회사는  연차소진을 장려한다.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좋아. 가뜩이나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이 시절을 돈으로 환산받아야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환멸을 느끼던 찰나였다.


컨설팅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지난 4개월 동안 꾸역꾸역 모아뒀던 연차와 포상휴가를 합치니, 무려 5일을 소진할 수 있는 상황. 여행이란 단지 어느 나라에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는 깃발 꽂기가 아닌, 그간 스스로에 대해 점검하고 내 삶의 궤도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바라보는 것.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들은 한결같이 여행을 다녀오라고 권했다. 팀에 양해를 구하고, 연달아 연차를 소진해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튀르키예(구 터키)로의 여정이 시작됐다.


사실 여행지를 고민했다. 안도 타다오와 르코르뷔제의 건축을 가성비로 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일본을 다녀올까, 아니면 동유럽으로 많이 언급된 튀르키예? 아니면 돈을 조금 더 써서 스페인?

일본은 자유여행이라 계획을 세우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았고, 스페인은 유로가 강세인 와중에 여행 경비가 신경 쓰였고, 그 와중에 튀르키예 패키지여행이 2단계 특가로 떴길래 튀르키예로 선택했다. 여행 떠나기 3일 전에 결제하고 짐을 싸기 시작한 여행자?  그게 바로 나야. (못 믿겠지만, 참고로 나는 MBTI 계획형 J이다.)


이번 튀르키예 여행을 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빌런의 역습, 그러나 낭만을 곁들인'이라고 정하겠다.

나는 튀르키예에 대해 카파도키아의 열기구가 환상적이구나,라는 것 외에 아는 것이 없었다. 그 유명하다던 파묵칼레도 몰랐고, 고대 그리스/로마 유적이 이리 생생히 현현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심지어 이슬람 국가라는 것조차도.


이슬람 문화는 규율의 강제가 상대적으로 엄격하다는 점에서, 나 자신이 추구하는 종교적 생각들과 상응하진 않는다. 이슬람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강력한 규율을 강조할 때 한편에서는 늘 예측이 불가능한 불특정 타자를 파괴하는데 거리낌 없는 폭력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뭐, 일단 이런 생각은 일단 접어두고.


타이항공을 타고, 방콕을 경유해 이스탄불로 넘어갔다. 해외여행 횟수가 늘어날수록 장시간 비행이 편해지는 건 기분 탓이려나. 타이항공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도착했을 때 나오는 경쾌한 음악과 기내식 사이드로 나온 일본식 단팥빵. 메인 기내식은 처음엔 괜찮았다가 점점 물렸다. 뭐, 그런 거지.


2018년 가을에 31박 33일 동안 배낭을 메고 유럽을 여행한 적 있다. 그때 영국-프랑스-오스트리아-이탈리아-포르투갈 5개국을 돌았는데, 일주일 내내 비 오는 로마를 전전하다가 포르투로 넘어가서 느낀 점.

'아, 나는 거리가 깨끗한 나라를 좋아하는구나'

튀르키예는 거리에서 깨끗한 느낌을 받진 않았다. 어딘가 정리가 안된 느낌. 거리에 개와 고양이가 많았다. 개와 고양이로부터 빌런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 오 나의 빌런님, 개밥맨

나는 내가 이번 패키지여행의 마지막 주자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제 당일, 룸조인을 할 생각이 있냐고 여행사에서 연락이 왔다. 원래 혼자 방을 쓸 계획이었으나, 룸조인을 하면 36만 원 가까이를 절약할 수 있었다. 여행사에 나의 룸메이트에 대한 정보를 물었으나, 개인정보라 어렵다며 70년대 생이라는 것까지만 알려줬다.


나는 괜스레, 나보다 많이 살아온, 점잖은 아저씨에게 듣는 인생 이야기를 상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늘 비극은 안도의 등 뒤에 실려오는 법. 내 예상을 보란 듯이 깨고 나의 원래 룸메이트는 이번 여행에서 다수의 입에 오른 개밥빌런, 일명 '개밥맨'이 되었다.


그가 개밥맨이 된 이유는 간단하다. 여행 내내 식사 시 남은 밥과 빵을 에코백과 위생봉지에 차곡차곡 넣고, 도착하는 여행지 곳곳마다 개들을 불러 밥을 줬기 때문이다. 밥을 먹는데 ‘이거 안 먹는 거죠?’라고 물었던 그가 인상에 남았다.

아아, 그는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 같았다. 사진 찍으려고 자리를 잡으면 어느 순간 몰려드는 개들. 이것이 진정한, 개와 늑대의 시간을 초월한, 개와 인간의 시간이라는 것인가. 누가 개이고, 누가 인간인지 모호하고 아이러니한 풍경.


개밥맨의 에코백에선 늘 음식 냄새가 났다. 우리 팀원들은 누구 하나 지적하지 않았다. 개밥 주는

걸 뭐라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단체였고, 그는 혼자이길 자처했을 뿐. 어리둥절했던 많은 사람들은 단지 그를 개밥맨이라 부를 뿐이었다.

 

개밥맨은 개밥을 주느라 자꾸 늦었고, 개밥을 주면서 활용했던 일회용품을 아무 곳에나 던져버렸다.


여하튼, 인간은 잠을 자야 하지 않던가. 나는 우연히도 개밥맨과의 룸메이트 자격을 박탈당했다. 혼자 패키지여행을 온 멋쟁이 동생 하나가 있었는데, 그 친구와 이야기가 잘 통해 숙소를 같이 쓰자는 얘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동생은 추진력 있게 가이드에게 건의해 룸메이트 교체라는 기적의 결과를 이끌어냈다.


심보선 시인의 시 중에 <형>이라는 시가 있는데, 그 시의 구절이 떠올랐다.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게 시니까 말이야.'


내가 이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내가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라는 증거겠지. 우연찮게 개밥맨과 룸메이트가 된 공무원 아저씨. 하필 개밥맨과 동갑이었던 공무원 아저씨. 불교신자였던 그는 여행 마지막 날에 이르러서야 '인생에서의 한계'를 토로했다. 나무아미타불.


곁에서 아미타불을 찾고 싶은 당신들은 그 간절함에 '너무 아미타불'이라 읊조렸을지도 모른다.


(PART.2에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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