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ine, I'm aging
할로.
얼마 만에 쓰는 문장인지 모르겠다.
그동안 여러 가지 감정들이 휘감았고,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글이라는 건 아플 때 쓰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겁한 거라고도 생각했지.
내 전공이 문학인데, 주변 애들이 글로 도피하는 꼴이 싫었다.
현실이 눈앞에 와있는데, 년 뭐 했냐!
-라고 말하고 싶었지.
누군가는 그 현실을 마주할 수 없어서
뿌리째 시들어버릴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나 좀 유해졌다. 야속한 시간의 바람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다니.
영원히 무뎌지지 않는 칼이 되고 싶었는데.
사람이란 이모저모 참 신기해.
아픔은 늘 진실과 가까이 닿아있다.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이 감정조차 어찌 거짓으로 꾸미오리까.
진실은 가변의 영역일까, 불변의 영역일까, 아니면 인지의 영역일까.
이건 차츰 생각해 보기로 하오리다.
어쩜 이리, 이것 보시라.
우쥬라잌 동네사람들? 내 말투를 보시라.
당신들이 추론컨대, 나는 세례를 받았다.
서촌에서 지낸 지 거의 1년이 되어간다.
벌써 1년이다. 브라운아이즈 말고.
내가 서촌의 작은 방에서 살자마자 했던 건
성당 미사에 참여해 보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미사 드릴 때
나는 뭣도 모르고 영성체 하러 나갔다.
얼마나 쭈뼛거렸으면
"세례 받으셨지요?"라고 얘기를 들었겠나.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오히려 그런 경험이
'까짓 거 세례 한번 받아보자'라는 결심으로 이끌었다.
예비신자 6개월 동안 나름 착실히 해냈다.
그리고 작년 12월에 우리 본당에서
첫 주임신부직을 맡게 된 신부님께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 내 성정상 의문을 품는 도마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나 보다.
최종 결정 후보로 토마스 모어, 토마스 아퀴나스 중 고민하다가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세례명을 택했다.
요즘에는 지향점을 고려한 세례명을 택하기도 한다고.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황소 같은 우직함과 끈기와 침묵 속에서 바로 선 신념을 닮고 싶었다.
성당에 다니자고 생각하기 전부터 이 세례명을 알고 있었다.
영화 <검은 사제들>을 보다가 구마에 대해 찾아봤고,
김웅렬 신부님 영상이 추천으로 뜨길래 여러 번 보기도 해서 익숙했다.
신기하다고 하면 신기했던 게,
예비신자 교육 과정 중 본당 주임 신부님이 새로 오셨는데
그분 세례명이 토마스 아퀴나스 셨다.
알지? 사람이 우연찮게 같은 것을 여러 번 마주하게 되면
그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그런 거.
그런 거를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왜 가톨릭이었냐고?
주변에 선한 사람들이 알고 보니 가톨릭신자라는 점.
미사가 내 복잡한 내면을 잔잔하게 만든다는 점.
광화문 근처에 사니 주말마다 열리는 집회를 보게 되는데,
근거 없는 힐난으로 노인들을 휘두르는 그 종교에 거부감이 느껴졌다.
이건 번외로 말하는 거지만,
사유재산을 가지고 어찌 신앙을 이끄는 목자로서 본분을 다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
너무 규칙적인 삶은 다양성을 요구하는 기류를 만들고,
너무 다양한 삶은 규칙을 요구하는 기류를 만든다.
내 체감상 지금은 규칙을 찾고자 하는 때.
나는 중용이 가장 아름다운 덕이라고 생각한다.
웹툰 <미래의 골동품 가게>에서 중부괘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중부괘가 중용과 가까운 예시가 아닐까 싶다.
나는 강려크한 혼돈을 타고난 사람이니
신앙이 나를 중용으로 이끈다고 믿고 있다.
요새? 평화롭고도 평화롭다.
마치 양들이 풀을 뜯는 것처럼.
자주 잊고 있었는데,
눈을 제대로 뜨는 방법을 잊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바흐는 참 대단해.
바흐 BWV645를 들어보시라.
혼탁한 눈앞의 커튼이 깨끗이 걷힐지니.
맑은 호수 위에 살포시 부는 바람 같을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