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비타민
예술은 당장의 먹고사는 문제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들 말한다. 배고픔을 직접 해소해주지도, 당면한 내면의 어려움을 즉각 해결해주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하루를 빠듯하게 살아내야 하는 바쁜 일상 속에서 악기는 늘 뒷전으로 밀려나곤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경제적 여유와 상관없이 예술은 당장 우리 삶에 당장 급하지 않은 ‘나중의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논리는 어느덧 문화예술의 영역까지 들어와 있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야 하고, 화려해야만 비로소 ‘상품’으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시대다. 하지만 잠시 숨을 고르고, 시선을 우리 마음 깊은 곳으로 돌려보면 어떨까. 순수하게 감각하고 표현하며 생동하는 그 에너지를 어떻게 숫자나 수치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예술이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가장 사회적인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나만의 고유한 빛을 품고 있으면서도,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려 공감을 이끌어내는 다정한 장이 되기 때문이다.
음악이라는 장르를 마주하고 악기를 연습하는 행위는 결국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과정이다. 손가락 끝 하나로 무엇이든 즉각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긴 시간을 들여 악기를 연습한다는 것은 조금 고루하고 지루한 반복일지 모른다. 하지만 AI가 인간의 영역을 대체하는 세상일수록, ‘나’라는 사람의 감각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악기와 함께 호흡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품고 부드럽게 노크한다. 내가 누구인지, 가장 나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노래하며, 몸으로 표현하는 예술적 행위는 잠든 감각을 동시에 깨운다. 이 과정에서 예술은 개인의 역사와 만나 정체성은 더 단단해 지고, 비로소 '자기다움', ‘나다움’으로 피어난다. 이렇게 자기다움이 투영된 다양한 몸짓이 곧 예술이 된다.
너무나 유명해서 익숙해진 명제지만, 음악은 뇌 발달에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음악은 단순한 유희를 넘어 신체, 특히 뇌의 전신 운동과 같다. 음악을 연주하거나 감상할 때 뇌는 끊임없이 새로운 신경 회로를 만들어 낸다. 무엇보다 나를 알아주는 것 같은 음악의 선율은 깊은 공감과 위로를 건넨다. 좋아하는 음악을 통해 요동치는 감정을 가라앉혔던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보았을 것이다. 이렇듯 감정을 건강하게 쏟아내고 소화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예술은 우리의 삶을 참 이롭게 하는 고마운 존재다.
오늘날 음악의 범주는 놀라울 정도로 넓고 다양해졌다. 어떤 음악은 비트가 산만하고 요란하지만, 오히려 그 격렬함으로 내 속마음을 대변하는 듯해 도파민을 자극하기도 한다. 아주 짧은 영상(쇼츠)의 배경음악으로 소비되고 금방 잊히기도 한다. 이런 음악들이 순간의 즐거움을 주는 '소비'를 위한 것이라면, 우리 내면을 성장시키고 깊은 유익을 주는 음악은 조금 더 긴 호흡을 필요로 한다.
자극과 화려함이 지배하는 현시대에 클래식이라는 장르가 때로는 ‘낡은 것’, '오래된 것' 혹은 '그들만의 리그'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클래식은 아주 오랜 시간 역사를 관통하며 살아남은 아름다움의 정수임이 분명하다. 늘 그 자리에서 유구한 역사를 품고 우리와 호흡하는 음악은, 무뎌진 감각을 깨우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자 우리 안의 인간성을 따스하게 틔워내는 소중한 밑거름이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