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오 Mar 31. 2023

떠나온 곳으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지만

조잔케이에서

 너무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오전 8시. 창을 열어둔 채 잠든 덕에 아침 햇살이 눈부셔 잠에서 깹니다. 잠이 덜 깬 상태로 느적느적 조식을 먹으러 갑니다. 조식은 일본 가정식 한 상차림으로 작은 종지그릇에 10여 가지 반찬과 생선구이, 그리고 찐 고기 한 점과 채소들. 일식의 가장 큰 특징은 정갈함이 아닐까 생각하며 식사를 합니다.  


 우선 시큼한 우메보시 한 알을 집어 밥 위에 올려 숟가락으로 떠먹습니다. 이렇게 먹는 이유는 책이나 드라마 같은 것들에서 첫 입으로 우메보시를 먹으면 새콤한 것이 식욕을 돋운다는 묘사를 많이 봤기 때문에 저도 우메보시가 있으면 습관적으로 따라 합니다만, 저에겐 그냥 시큼할 뿐입니다.


 창 밖엔 눈 밭에서 노니는 까마귀 한 마리가 있습니다. 새에게도 나는 것은 힘든 일인가 봅니다. 날아가면 될 것을 저리도 뛰어다니는 걸 보니. 먹이를 찾는 것인지 연신 눈밭을 부리로 쪼아 보지만 새 부리보다 두꺼이 쌓인 눈밭에서 무언가 찾을 리 만무합니다. 실망한 까마귀는 이내 날아가버리고 아직 아무도 밟은 이 없는 쌓인 눈 위에 까마귀 발자국만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렇게 나물도 한 입, 생선도 한 입, 찜도 한 입, 낫토도 한 입. 낫토는 아무리 먹어봐도 제 입맛에는 맛질 않아 수란과 우롱차로 입가심을 하고 식당을 나와 방으로 돌아옵니다. 어제 노천탕과 대욕장은 가보았으니 오늘은 그냥 방에 있는 욕조에서 목욕을 하기로 합니다. 물을 받고 탕에 들어가니 물이 많이 뜨겁지만 식히기엔 시간이 오래 걸리기에 그냥 참아보기로 합니다. 오늘 이 숙소를 떠나야 하는 여행객에겐 여유가 없습니다.


 탕에 들어가 밖을 보니 집들은 여전히 흰 눈모자를 쓰고 있고 하늘은 푸르고 설산은 그 자리입니다. 사랑도 우정도 나 자신도 조금씩 변해가지만 설산만큼은 언제까지나 변치 않고 이 모습 그대로 저를 맞아줄 듯하여 위로가 됩니다.


 목욕을 마치고 떠날 준비를 합니다. 오랜만에 니트를 꺼내 입고 윗 옷은 먹색 더플코트, 감기 걸렸으니 목의 온기를 담당할 목도리까지. 이놈의 감기는 삿포로 여행을 끝까지 함께하려는지 나을 기미가 안보입니다. 약 한 알 챙겨 먹고 올 때 탔던 버스를 탑승해 다시 삿포로로.


 삿포로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맡기고 점심을 먹습니다. 일본 식당의 장점 중 하나는 식사를 마친 후 차를 한 잔 내어준다는 것. 차를 마시며 식사 후 입 안의 텁텁함을 털어냅니다. 이후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십니다. 오늘도 역시나 아이스라테를 시키지만 맛이 별로입니다. 그저 시간만 좀 때우다 숙소로 돌아와 휴식을 취합니다.


 명소들을 잘 찾아다니지 않는 터라 여행을 할 때면 항상 이렇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한 잔 하고 점심을 먹고 다시 커피나 차를 한 잔 하고 저녁 식사에 술을 곁들이고 부족한 취기를 채워줄 술집을 찾아 그곳에서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그 중간중간 숙소로 돌아와 휴식을 갖는 것. 그것이 저에겐 여행입니다.


 혹자는 그런 것도 여행이라 할 수 있냐 묻지만 저는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라 믿기에 그저 발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다시 오면 그만일 것입니다. 떠나온 곳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돌아올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인연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해도 저 설산만큼은 기다려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한 번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아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