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란 무엇일까?
나의 20대는 치열했다. 꽤나 갑작스럽게 유학길에 올랐고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소수인종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남들보다 더 긴장한 채 살아야 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한국 드라마와 음악을 끊는 것이었다. 언어를 배우기 위해 영어권 영상만 보고 팝송으로 플레이리스트를 갈아치웠다. 가벼운 여가나 취미조차 실용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미드 감상, 요리, 운동이 내 취미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젠 게이밍 키보드 수집이나 전통 다도 같은 순수 ‘재미’를 위한 취미를 가진이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재미란 무엇일까?”
문득 왜 인간은 재미를 느끼고 싶어 할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수분이나 에너지를 제공해 주는 행위도 아닌데 왜 우린 재미있는 것들이 재미있는 걸까?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아마 많은 이들의 눈에 익숙할 이 매슬로의 욕구단계설이었다. 인간의 기본 욕구(Needs)를 다섯 단계로 나누어 피라미드 모양으로 유형화한 이 이론은 관련 연구자료 중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행동을 설명해 줄 것만 같았던 이 피라미드의 어느 층에도 '재미'가 속할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다양한 자료들에 명시된 각 카테고리별 하위 욕구까지 찾아보았지만 '재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행동은 설명이 잘 되지 않았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이렇게나 찬란한 시대에 살고 있는데. 앞뒤가 맞지 않다고 생각하던 와중 흥미로운 저널 논문 하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Beyond Maslow’s Pyramid: Introducing a Typology of Thirteen Fundamental Needs for Human-Centered Design (매슬로의 피라미드 그 이상: 사용자 중심 디자인을 위한 13가지 인간 욕구 유형화)
By: Pieter Desmet and Steven Fokkinga (Faculty of Industrial Design Engineering, Delft University, 2628 CE Delft, The Netherlands)
Published: 7 July 2020
[출처 MDPI]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의 욕구에 관해 연구한 학자가 매슬로만 있었건 것은 아니다. 매슬로가 5단계설을 제안할 때 다른 학자들은 인간의 욕구를 10개, 15개, 심지어 135개로 나누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매슬로의 연구물은 전 세계 심리학을 통틀어 가장 많이 인용된 순위 #14위에 들 정도로 그 명성이 높다. 경영, 마케팅 등 수많은 분야에서 회자되고 특히 디자인 학도들 사이에서 수없이 언급되는 저명한 이론이지만 사실 이 이론은 디자인과 디자인 리서치를 뒷받침하기 위한 용도로 설계된 연구의 결과물은 아니다.
그래서 이 논문은 Human-Centered Design(사용자 중심 디자인)을 하고자 하는 디자이너와 리서처에게 인사이트를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간의 욕구를 분석한다. 매슬로 이론과 이후의 학자들이 발표한 연구자료를 모두 참고하여 기존 이론의 강점은 취하고 한계점은 보완하며 구체적 대상을 위한 의도된 시선으로 새로운 이론을 펼친다. 저자는 인간의 욕구를 다음과 같이 총 13가지로 구분했다.
1. 자율성 (Autonomy)
2. 아름다움 (Beauty)
3. 편안함 (Comfort)
4. 커뮤니티 (Community)
5. 능력 (Competence)
6. 건강 (Fitness)
7. 영향력 (Impact)
8. 도덕성 (Morality)
9. 목적 (Purpose)
10. 인정 (Recognition)
11. 교류 (Relatedness)
12. 안전 (Security)
13. 자극 (Stimulation)
영문 알파벳순으로 나열된 리스트이며 매슬로의 이론이 피라미드 형식의 단계론인 것에 반해 해당 논문에서 제안하는 이론은 각 욕구들 간 별다른 계층 구조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 13가지 리스트 중 다섯 번째 욕구인 능력(Competency)과 열세 번째 욕구인 자극(Stimulus)에서 '재미'와 관련된 단서들을 찾을 수 있었다. 능력의 욕구는 자신의 역량을 활용해 어려움을 해결하고 주도권을 가지고 싶은 욕구라고 설명되어 있으며 하위 욕구(Sub-Needs) 중 하나로 도전(Challenge)이 표기되어 있다. 자극의 욕구는 지루하거나 무감동한 상태에서 벗어나 신선함과 새로움을 통해 육체적, 심리적으로 자극된 상태를 원하는 욕구라고 설명되어 있으며 하위 욕구 중 하나로 놀이(Play)가 표기되어 있다.
TV에서 컵 쌓기의 달인을 본 적이 있다. 달인은 12개의 플라스틱 컵을 피라미드처럼 쌓아놓고 순식간에 접어냈다. 놀이처럼 보일 수 있지만 국가대표도 있는 엄연한 공식 스포츠이다. 스포츠스태킹이라고 불리는 이 경기는 취미로 즐기는 사람들도 아주 많다. '이게 뭐가 재밌지?'라고 짧은 의문을 가졌었는데 스태커들의 말에 따르면 스포츠스태킹의 묘미는 바로 자신의 최단 기록을 깨기 위해 도전하는 데 있다고 한다. 이 영상은 스포츠스태킹 공식 최고 신기록 현장인데 4.753초의 짧은 경기를 마친 선수가 방방 뛰며 신나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정말 순수하게 '재미'있어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 순간 그 선수는 능력의 욕구를 정복했다.
넷플릭스만큼 자극의 욕구를 잘 대변할 수 있는 예시가 있을까? 넷플릭스는 굉장한 고접근성의 '재미' 제공책이다. 손 끝 스크롤 한 번에 온갖 장르의 신선함과 새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 물론 넷플릭스가 충족시키는 게 자극의 욕구만은 아니다. 영화제 수상작의 미장센은 아름다움의 욕구를, 환경 다큐멘터리가 전하는 메시지는 도덕성의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 며칠 전 넷플릭스의 실적발표가 있었다. 지난해 4분기 대비 유료 신규 가입자가 766만 명이나 늘어났다.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넷플릭스가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건 재미 그 이상의 가치(=한 가지 이상의 욕구의 해소)를 전달하기 때문이 아닐까? 지난해 말 기준 넷플릭스의 회원 수는 무려 2억 31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재미를 위해 월 구독료를 기꺼이 감수하는 이들이 이리도 많다.
'재미'는 욕구(Needs) 충족 시 발생하는 잠재적 결과물이다. 잠재적이라고 한 이유는 모든 욕구 충족이 재미로 이어지진 않기 때문이다. 그저 허기만 채우려고 먹는 식사는 건강(생리학적) 욕구를 채워주긴 하지만 재미있는 행위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까? 바로 부가적인 욕구 충족 요소를 더하는 것이다. 허기만 채우려는 식사가 재미없다면 함께 식사할 동료를 만들어 교류의 욕구도 채워보려 할 수 있다. 혹은 정성스럽게 플레이팅 해서 아름다움의 욕구까지 챙겨볼 수도 있겠다. 공부를 하긴 해야 하는데 재미가 없다면 영어 단어를 얼마나 빨리 외우는지 자신만의 기록을 만들어서 도전해 보거나 카드놀이 형식으로 게임화하는 시도를 해볼 수 있다. 재미없는 행위에도 얼마든지 손쉽게 재미요소를 추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해 보니 결국 재미있는 삶을 사는 것은 자신의 욕구에 귀를 잘 기울이는 거라 생각된다. 학자들이 나누어 놓은 인간의 욕구 5, 13, 혹은 135가지 카테고리 중 하나가 '재미'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욕구를 충족해 나가는 그 자체가 재미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의 두뇌는 굉장히 똑똑해서 자신의 몸에 부족한 영양소를 섭취하고 싶어 지게끔 만든다고 한다. 가령 난데없이 귤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몸에 비타민C가 부족한 상황일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우리가 재미있는 것을 재미있어하는 이유는 재미와 인간의 욕구가 앞서 설명한 것처럼 끈끈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저 욕구들을 충족해야만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영위할 수 있고 재미는 우리가 욕구들을 성실히 충족해 나가게끔 하는 자극제 역할을 해준다. 재미는 물과 음식 같은 직접적인 생존 필수 요건은 아니지만 우리가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도록 간접적이지만 중요한 역할을 해준다. 우리가 흔히 하는 '잘 노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라는 말의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 난 사람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재미를 찾고 또 권장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