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길 평안하시길

11월에 편집일이 두 개 들어왔다.

하나는 몇 달 전에 맡아서 하기로 아예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도록 작업이었고

하나는 생각지도 않았다가 갑자기 들어온 그림책 편집 일이었다.


20대 때 편집일을 했었지만 손 놓은지도 한참 전이고

그 뒤로도 개인적으로 혹은 지인들의 도록 작업 같은 소소한 일들은 했어도

페이지 수가 많은 작업은 정말 오랜만이라

이번 도록 작업은 긴장감을 가지고 신경을 많이 써서 완성을 할 수 있었다.


우연한 인연으로 맡은 그림책은 아마추어 작가님의 작품이었다.

투박한 그림과 살짝 매끄럽지 않은 글로 채워진 짧은 페이지들이었지만

작가님의 인생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본인은 기억할 수 없는, 부모와 주변사람들에게 들었을 태어난 이야기와

스스로 기억하는 살아온 인생, 그리고 눈 앞까지 닥쳐온 죽음 후의 이야기까지.


희귀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고, 가야할 곳은 호스피스 병원이었지만

작가님은 그저 하고 싶은 일들로 남은 시간들을 채우시길 원하셨고

호텔에서 머무셨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그림책 수업을 들으시고 그리고 쓴 첫 번째 그림책을

소량이지만 하드커버 제본까지 해서 예쁘게 만들려고 수소문 하시다가

지인소개로 나에게 까지 연이 닿았다.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나 또한 죽음과 점점 가까워진다.

내 나이는 아직이겠지만, 가까운 지인들의 장례식이 잦아지고 있으니까.

그래서 작가님의 이야기의 무게감은 확실히 전해졌었다.


어떻게든 생전에 책을 드리고 싶어서 나름 서둘러 작업을 했는데

중간에 결국 쓰러지셔서 병원에 들어가셨고

수정작업을 위한 피드백은 동생분과 주고 받는 상황이었다.

오늘 인쇄소에 의뢰를 하려던 차에 연락이 왔다.

임종이 머지 않은 상태라 일단 일정을 멈추었다가

작가님의 장례가 끝나고 유가족의 추모글을 모아서 추가해서 다시 진행하고 싶다고.


처음에 일을 의뢰하고 편집비를 미리 선불로 전액 지불하셨는데

아마도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셨나 싶었다.


못보시고 가셔서 안타깝고 아쉬움이 남는다.

아주 열심히, 열정을 다해 살아내셨던 작가님께서 부디 평안하시길 바란다.

가는 길이 그림책의 꽃밭처럼 알록달록 즐겁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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