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봄을 꿈꾸는 나의 봄(완결)

<따듯한 봄날을 기다리며>

by 나의봄

사람에게도 축이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

마음에 구멍이 뚫렸다는 말로도 설명되지 않는,

그런 허전함과 기울어짐이 내 안에 남았다.


사진과 영상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상실은 채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아팠던 건,

아빠와 단둘이 찍은 사진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우리 둘만의 많은 시간과 애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 않다는 게, 나를 더 아리게 했다.


돌이켜 보면 2015년부터 지금까지,

나는 무너지고, 일어서고,

다시 무너지는 일을 반복해 왔다.

새언니의 죽음, 자그만 영어학원의 실패,

결혼과 첫 유산,

글에 미처 적지 못한 반려견의 죽음,

아쉽게 멈춰버린 ‘나의 봄’,

그리고 사고로 장애를 입은 오빠까지.


부쩍 늙어버린 부모님은 내가 무너지고 아파할 때마다

그럼에도 “너는 네 길을 가라”라고 말해주셨고,

남편은 언제나 내 자존감을 붙잡아주었다.

그 지지 덕분에 나는 교실에서 나의 봄으로

그리고 다시 교실로 돌아올 수 있었고,

학원에서 원장이 되어 리더로서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빠를 잃은 빈자리는 너무 컸다.

엄마는 평생 아빠에게 의지했고,

오빠는 이제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웠다.

조카들은 아직 어렸고,

남편과는 어느덧 주말부부가 되었다.


나는 어느새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또 다른 축이 되어 있었다.

더 이상 투정도, 하소연도 허락되지 않았다.

걱정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아빠도 세상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두 번의 유산을 더 겪었다.

아빠는 외할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말을,

그렇게 입에 달고 사셨었는데.


마음은 군데군데 찢겨 있었지만,

나는 보살피지 않았다.


이번에도 결국 내가 택한 길은

‘일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나는 상처 난 내 마음은 무시한 채,

학원을 내 상처를 덮는 도피처이자,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시키는 무대로 삼았다.


매일 오후 4시부터 밤 10시까지,

토요일에도 종일 수업과 클리닉.

행정, 마케팅, 결산, 선생님 관리까지

손에 쥐고 살았다.


하루하루 성취는 쌓였고, 학원은 자라는 듯했다.

2024년 봄에는 내가 맡은 캠퍼스가

개원 이래 최고 재원생 수를 기록했고,

2025년 봄에는 2관을 열 정도로 커졌다.

그것은 정말 내 영혼과 몸을 갈아 넣은 결과였다.


그러나 그 모든 성장은 착각이었다.

나는 제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바로 상처받은 채 돌봐지지 못한 나 자신이었다.


몸은 이미 오래전부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만성 두드러기, 간의 12cm 혈관종,

심해진 편두통, 늘 달고 사는 위통.

의사들은 하나같이 휴식을 권했지만,

나는 “요즘 저만큼 스트레스 없는 사람이 있나요”

그렇게 충고들들 넘겼다.


학원은 내가 필요한 곳, 인정받는 곳이었기에,

학원과 나를 분리시키면 나 자신도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스스로를 무시했다.


그러다 2025년 초봄, 화장실에서 배가 너무 아팠다.

혹시나 하고 확인한 소변은 콜라색이었다.

낯선 공포가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남편과 함께 응급실로 달려갔고,

여러 검사를 받은 결과 검사 결과,

너무 높은 염증 수치와 함께,

방광벽이 무너져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늦었으면 신장까지 위험했을 거라 했다.


서러웠다. 너무 서러웠다.

나는 항상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는데,

결과가 내 뜻한 바대로 되지 못함에,

야속함이 몰려왔다.


그렇게 멍하니 병실 천장을 보며 눈물을 흘리다

고개를 돌리니 남편의 서글픈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내색도 못하고,

내 손을 꼭 잡은 채,

늘 기울어진 내 축을 온 마음과 몸으로,

지탱해 준 사람이 바로 남편이었다.

그도 나와 함께 지쳐 있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그제야 알았다.

상처받은 나를 스스로 무시하며 놓고

일에만 매달리던 사이

내가 놓치고 있던 또 한 사람은 바로 남편이었음을.


이젠 멈춰야 한다는 외침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학원은 학원이었고,

더 이상 내 상처와 아픔을 미뤄선 안 될 것 같았다.


게다가 그렇게 아프고 돌아간 후에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는 게 없어서,

여전히 내가 모든 일들을 해내야만 했고,

그럼에도 냉정한 평가와 다른 캠퍼스들과의 경쟁,

또 다른 학원들과의 경쟁이 나를 옥죄였다.

더 있다가는 진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만둔다’는 말은,

내 안의 책임감에 눌려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몇 번을 망설이고 망설이던 끝에,

나는 그 병실에서 서글펐던 남편의 얼굴과,

마지막까지 내가 힘들어할까 봐

걱정만 하던 아빠의 눈빛

그리고 나의 몸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어렵지만,

이제 그만 목동에서의 걸음을 멈추기로 했다.


정든 사람들과 장소와의 이별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내 또 다른 봄날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돌아보면 봄은 언제나 내 삶에서 특별했다.

시작이 있는 계절이면서

동시에, 이별과 아픔,

상처가 찾아오던 날들이기도 했다.


벚꽃처럼 짧게 피었다 지는 아름다움도 있었고,

초봄 새벽처럼 쌀쌀해 온기가 필요했던 순간도 있었다.

비 내리는 봄밤처럼 차갑고 외로운 시간도 있었다.


원망이 앞서 차갑게 시작된 봄도 있었고,

형형색색 꽃들에 마음이 녹아

‘아직 살 만한 세상’이라 위로받던 봄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모른다.

앞으로 내 남은 봄날이,

낮처럼 따뜻할지,

새벽처럼 쌀쌀할지,

밤처럼 쓸쓸할지.


그러나 나의 희망은 언제나 긍정적이라

오직 따뜻한 봄날만을 바랄 뿐이다.

그리고 나의 봄뿐 아니라,

당신의 봄도 따뜻하기를 바란다.


무수히 많은 확률 속에 이 세상에 태어나,

우리로 살아가는 당신과 나.

그리고 무수히 많은 사건 사고 속에서도,

오늘 하루를 무사히 살아낸 우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여러 봄을 지내고 보니,

그냥 우리는 우리여서 소중하고,

존재의 가치만으로도 귀하다.


그래서, 나는 바란다.

당신과 내가 살아내는 그 봄날이
조금은 덜 아프고, 조금은 더 따뜻하길.

그리고 언젠가.
우리 모두가 서로,

당신의 따뜻한 봄을 꿈꾸는 나의 봄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