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봄을 꿈꾸는 나의 봄(21)

<안녕, 나의 사랑>

by 나의봄

나는 아빠가 마흔네 살,

엄마가 마흔두 살일 때 태어난 늦둥이다.

오빠와는 무려 열한 살 차이.

막내이자 외동처럼 자라며, 사랑은 늘 내 몫이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나는 여전히 투정 부리는 게 익숙했고,

아빠는 “우리 딸내미”라 부르며

언제나 나를 감싸주었다.


결혼 뒤에도 아빠는

혹시 내가 부족함을 겪을까 늘 염려하셨다.

몰래 용돈을 쥐여주셨고,

돌이켜보면, 학창 시절에도

늘 등굣길에 함께 걸어주셨다.

대학 시절, 첫 오리엔테이션에 갔을 땐

세 시간마다 아빠로부터 전화가 와서

친구들 사이에 ‘파파걸’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누구보다 각별한 사랑이었다.


그래서 사회에 나와 힘들 때면

가장 먼저 찾는 건 늘 아빠였다.

억울한 일을 겪어도, 지칠 때에도,

아빠는 늘 같은 말을 해주셨다.


“힘들면 그만둬. 아빠가 있잖아.

넌 아빠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나는 그 말이 세상에서 가장 큰 위로였다.


그런데 상담을 위해 내원했던 그날,

교수님 진료실 앞에서 의료진이 나를 불렀다.

“보호자분, 이쪽으로 오세요.”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언제나 나의 보호자였던,

아빠의 보호자가,

이제는 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내가 왔다는 소식에 병실에서 나와

멀리서 걸어오는 아빠의 모습은

눈에 띄게 왜소해져 있었다.

그 순간, 눈물이 차올라 시야가 번졌다.


“교수님이 뭐래? 수술 꼭 해야 된대?”

아빠의 질문에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결국 교수님의 말을 그대로 전하고,

조심스레 내 생각을 덧붙였다.


“아빠, 언제 어디서든 쓰러질 수 있다는 건

너무 위험해요.

쓰러져서 고생하는 것보다는,

가능성에 희망을 걸어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빠는 긴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딸내미 말 들어야지.

그럼 나 수술할게.”


수술 당일, 1분 1초가 끝없이 길었다.

생각보다 수술은 오래 걸렸고,

불안이 차오를 즈음 수술실 문이 열렸다.

수많은 장비에 연결된 채 누워 계신 아빠의 모습은

너무 비현실적이라 영화 속 장면 같았다.


‘괜히 내가 수술을 권해서 저렇게 힘든 건 아닐까….’

죄책감이 밀려왔다.


의사는

“수술은 잘 됐다. 이제 의식 회복이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말투는 확신에 차 있던 상담 때와 달랐다.

불안은 더 깊어졌다.

결국 아빠는 깨어나지 못했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면회가 제한된 코로나 시기,

나는 간호사의 목소리로만

아빠의 소식을 전해 들어야 했다.


밤마다 주차장 구석에 앉아 엉엉 울었다.

엄마는 점점 나를 원망했다.

끝내 말은 잇지 못했지만,

그 눈빛 속에는 “왜 그런 선택을 했니”라는

질문이 담겨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서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님이 의식을 회복하셨습니다.”

그 한마디에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고,

입술에서 절로 감사의 기도가 터져 나왔다.


비로소 희망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아직 아빠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이 달라 보였다.


간호사가 준비물을 부탁했을 때조차 기뻤다.

살아 계시다는 게 너무 고마워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후로 2주 동안 매일 아침 병원으로 향했고,

다시 학원으로 돌아와 수업을 이어갔다.

두 세계를 오가며 어느 것에도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웠지만,

이번에는 절대 무너지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희망과 기대와는 달리,

며칠 뒤, 의사가 가족 면회를 허락했다.

“볼 수 있는 가족분들은 다 만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 말은 이별을 준비하라는 신호처럼 들렸다.


병실 안, 산소호흡기 아래에서,

힘겹게 숨을 쉬는 아빠의 모습은 차마 믿기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의 가슴팍에 안겨 울며 말했다.

“여보, 일어나야지…”


그 순간 죄책감이 몰려와 나는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수술을 권한 내가 너무도 미웠다.

남편이 주저하는 내 옆구리를 툭 찔렀다.

정신을 차리라는 듯.


나는 겨우 아빠 곁에 다가가 조심스레 불렀다.

“아빠…”


그러자 기적처럼 아빠는 눈에 힘을 주고

나를 바라보셨다.

그 눈빛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네 잘못 아니야. 네 책임 아니야. 아빠 괜찮아.”


그리고 아빠는 곁에 있는 남편의 손을 꼭 잡으셨다.

힘든 숨을 몰아쉬면서도, 끝까지 ‘괜찮다’는 듯

나와 그를 바라보셨다.


"아버님. 얼른 회복하셔야죠."
남편의 말에 아빠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셨다.


그 순간, 나는 아빠의 눈을 보며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것은 조건 없는 사랑, 곧 아가페 사랑이었다.


아빠의 눈빛에는 수술을 권한 나에 대한 어떤 원망도, 후회도 없었다.

오직 나를 위로하는 따스한 마음과,

자책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

마지막까지 가족을 부탁하는 사랑만이 담겨 있었다.

그 사랑은 내가 어떤 모습이든, 어떤 선택을 했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끝까지 안아주는 힘이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아빠의 사랑의 깊이를 실감했다.

아빠가 평생 보여주신 모든 애정이,

결국 이 한순간을 향해 흘러왔음을 알았다.

그것이 아가페, 아빠 사랑의 본질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 2022년 5월의 봄날.

의사는 아빠의 사망을 선고했다.

엄마는 충격에 쓰러지셨고,

장례 절차의 모든 일은 내 몫이 되었다.


평생 동안 나를 향해

“넌 잘해, 넌 귀여워, 넌 예뻐,

넌 똑똑해, 넌 할 수 있어”라며

응원해 주던 아빠가,

마지막에는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눈빛 하나만 남기고 떠나셨다.


장례식장 한편에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준비조차 하지 못한 채 맞이한 이별이었다.

그런데도 현실은 나를 붙잡았다.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내가 책임지고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총괄원장님께 전화를 걸어 소식을 알렸다.

“걱정 말라, 내가 대신 학원을 돌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제야 마음 한 편의 무거운 짐을 조금 내려놓고,

아빠와의 이별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아빠가 마지막 날 남편의 손을

다섯 번 꼭 쥐셨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곰곰이 장례식장에서 생각해 보니

그 다섯 번은 엄마, 나, 오빠,

그리고 조카 둘을 의미하는 것 같다고 했다.

아빠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마음에 품고 계셨던 것이다.


코로나가 끝나가고,

모두가 다시 자유를 꿈꾸던 그 봄날.

나는 내 평생의 지지자이자 후원자이자 친구이자,

삶의 기둥이었던 아빠를 떠나보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괴로움이 따라다녔다.

“그때 수술을 하지 않았다면

아빠가 아직 살아 계셨을까?”

수없이 자책했다.


마지막으로 받은 문자가 다름 아닌

아빠의 부재중 전화 알림인 것마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아빠의 말을 떠올렸다.

언니를 땅에 묻던 날 아빠는 나에게

슬픔을 꾹꾹 참으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하셨다.


“떠난 사람을 기쁘게 하는 방법은

우리가 모두 제자리를 찾아 열심히 사는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구멍 난 마음을 안고서도

다시 일어서려 애썼다.

그것이 아빠가 원하실 길이었으니까.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내야 할 봄날이,

내 앞에 여전히 남아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