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라 부르기엔 너무 차갑던 시간>
빡빡하게 돌아가는 톱니바퀴.
모든 게 제자리를 딱 맞아야만
하나의 기계처럼 매끄럽게 돌아간다.
누구 하나라도 힘을 놓아버리면
어기적거리다 금세 삐걱이고 만다.
그래서 원장인 나의 하루는,
하나부터 열까지 잘 맞물려 돌아가는지
숨 고를 틈도 없이 살피는 일이었다.
나는 입사 순으로는 막내였지만 그 사실은,
내게 주어진 무게를 덜어주는 방패막이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이제는 제일 앞에서 나아가야만 하는 자리였다.
‘모르니까, 처음이니까’라는 말로
실수를 용서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아셨을까.
걱정 어린 투정을 늘어놓으면
아빠는 언제나 “열심히 하면 언젠간 인정받는다”며
부드럽게 등을 두드려 주셨다.
그래서 21년의 겨울은,
차갑고 매서웠지만
작고 치열한 나의 원장 업무들로
조금씩 포근한 봄을 준비해 가고 있었다.
캠퍼스 원장이 되어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변 학원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이었다.
우리의 강점은 초등과 중1까지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촘촘한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중2, 중3으로 자라며
사춘기의 문턱에 서게 되면,
단순한 시스템만으로는 마음을 붙잡을 수 없었다.
시간과 인원의 한계는 곧 균열이 되어
틈새로 아이들이 빠져나가곤 했다.
그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경쟁 학원들을 보며
나는 다짐했다.
“한계를 선생님들에게만 지우지 말자.
내가 직접 그 틈을 메우자.”
그래서 고등부에서 쌓은 경험을 꺼내어
중2, 중3의 소수 탑반 아이들을 직접 품었다.
주변 고등학교의 시험과 분위기를
하나하나 짚어 나갔다.
출제 경향표를 넘기며,
그것이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아이들을 지켜낼 또 다른 방패막이라는 걸 믿으며.
매일매일 나만의 자료들을 만들어나갔다.
본사에서 시키지 않아도
내가 알게 된 것들은 상담과 설명회를 통해
부모님들과 나눴다.
그건 지식을 전달하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아이들을 함께 돌보고 있다 ‘는
약속을 건네는 자리였다.
정말 바쁘게 움직였다.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외우고
등하원 때 인사를 건네며 눈을 맞췄다.
수업 역시 소홀히 하고 싶지 않아
밤마다 자료를 들여다보며 철저히 준비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내 삶에서 배운 건
노력은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진리였다.
22년 1월, 내 첫 설명회에는
단 여섯 분의 학부모가 찾아오셨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 하는 듯한
차가운 눈빛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럼에도 정성을 다해 상담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수업을 이어가다 보니
입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늘자 선생님들도 자연스레
내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와 주었다.
불안으로 미칠 것 같던 하루하루였지만
한 달, 두 달을 견디고 나니
조금씩 일이 돌아가는 이치를 알게 되었다.
“목동 앞단지에서라면 이제 나도
명함쯤은 내밀 수 있겠구나.”
그런 희망이 봄 햇살처럼 찾아왔다.
그 무렵, 학원일에 온 마음을 다 쏟고 있던 봄날.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가
내 삶의 속도를 단숨에 멈추게 했다.
“은평성모병원 흉부외과입니다.
아버님이 응급실을 통해 입원하셨습니다.
자녀분과 상담이 필요합니다.
내원해 주시겠습니까?”
순간 세상이 텅 비어버린 듯했다.
수업, 결산, 시간표, 블로그, 시험, 상담.
일에 치여 부모님께 소홀했던 시간이
한꺼번에 마음을 후벼 팠다.
진료실에서 마주한 교수의 굳은 표정은
좋지 않은 예감을 확신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버지의 심장 판막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말.
그리고 수술에는 자녀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말.
귀에는 분명히 소리가 들어왔지만
머리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15년에 새언니를 암으로 떠나보냈고,
19년에는 오빠가 교통사고로
반신마비와 인지장애를 얻었다.
그 모든 고통을 견뎌내며
이제는 괜찮을 거라 믿었는데,
평생 내 편이 되어주던 아버지마저 위태롭다니.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수술 후… 생존율은 얼마나 됩니까.”
교수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대답했다.
“보통은 치사율이 1%입니다.
하지만 아버님은 당뇨가 있어 5%까지 봐야 합니다.”
5%라는 숫자가 귀에 맴돌았다.
결코 큰 수치가 아니었지만,
내게는 차갑고 두려운 무게로 다가왔다.
교수는 곧 덧붙였다.
“최근에도 같은 케이스가 있었고,
제가 판막치환술 수술한 경험만 해도 천 건입니다.
수술 후 회복과 퇴원까지는 약 2주 정도 예상됩니다.”
너무 어려운 결정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다가
겨우 입술을 떼며 말했다.
“하루만, 고민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22년 봄.
그 봄은 매 순간을 놓치지 말라며
나를 끝없이 일터로 밀어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버지의 생명을 두고
머뭇거릴 틈 없는 선택을 내게 요구했다.
일과 사랑, 책임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몰아치던 그 계절은
결국 내 안에서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