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요, 원래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지만,
21년 초, 아픈 팔을 붙잡고
‘나의 봄’을 놓을까 고민하던 나는
그해 가을, 불현듯 목동 한복판
대형학원의 원장이 되어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것은 고작 1주일의 인수인계.
그리고 남겨진 건 수없이 쌓인 파일들이었다.
상담, 교재, 수업, 선생님 관리뿐 아니라
수입과 지출을 챙기고 결산까지 해야 하는 자리.
휘몰아치듯 이어진 인수인계 동안
나는 정신없이 받아 적고 메모했지만,
돌아서면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
금세 잊어버리곤 했다.
매일이 폭탄 처리반에 투입된 기분이었다.
메신저에는 읽지 못한 쪽지가 쌓여 갔고,
알지도 못하는 반, 알지 못하는 학생,
그리고 알지 못하는 어머니의 컴플레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말고사 대비 시간표는
스프레드시트 위에서 줄곧 삐걱거렸고,
어떤 조합을 만들어도 틀린 값이 튀어나왔다.
밤마다 하루를 정리하며 특이사항을 기록하고
본사에서 요구하는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잠을 잊은 날이 이어졌다.
수업의 질은 떨어졌고,
선생님들의 눈빛에는
새 원장에 대한 피로와 불만이 담겨 있었다.
사실, 처음 학원에 들어왔을 때부터
숨소리조차 나지 않는 교무실의 분위기와
꽉 막힌 팀워크가 이상해
기어이 들쑤시고 바꿔보려 애를 썼던 건데,
누군가는 그것을 다정한 동료애라 보았지만,
누군가는 잘 나서기 좋아하는 관종,
심지어 전임 원장을 밀어내고
자리를 꿰찬 사람으로까지 여겼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팀장은 나를 사사건건 걸고넘어졌다.
내가 원장이 되었어도
이 학원에서는 자신이 선배라는 걸
굳이 강조하고 싶었던 눈치였다.
시간표를 내밀어도, 회의록을 배부해도
꼭 손을 들어 말했다.
“여기는요, 원래 그렇게 안 했어요.”
“여기는요,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원장님, 왜 그렇게 하세요? 원래는요…”
집으로 가는 길에도
그 말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러나 나는 팀장의 그 말들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곳에 온 지 고작 7개월 차,
어느 계절에 어떤 일이 돌아가는지도 몰랐고,
본사도 목동이라는 지역의 특수성에 대해
정확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팀장의 무시는 결국 선을 넘고 말았다.
하루는 팀장의 담당 학교 시험 분석을 받아
내가 블로그에 올렸는데,
그 글에 나의 수정 흔적이 남았다는 이유로
팀장이 교무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눈물까지 머금은 채였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험 분석은 원장에게 보고한 자료였다.
그 자료를 블로그에 쓰든,
참고용으로 남기든,
학부모 설명회에서 나누든
결정은 내 권한이었다.
명백한 월권이었다.
하지만 교무실 공기는 이미 얼어붙었고
결국 나 역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싸움을 벌이고 말았다.
속이 무너져 내렸다.
원장이 되길 바라 입사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상황의 물결에 떠밀려 여기까지 왔을 뿐인데,
왜 이런 무시와 하대를 받아야 하는 건지
서러움이 북받쳐 총괄원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원장님은 차분히 내 말을 들으시더니 말씀하셨다.
“일단, 그 팀장님과는 학원 말고
카페에서 이야기하세요.
진솔하게 원장이 되어 힘들었던 점도 털어놓고,
혹시 감정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하다고 하세요.
원장님이 속상한 건 알지만,
지금은 원장님이 마음이 더 큰 사람이라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다른 선생님 앞에서 싸웠다면 체면도 회복해야죠.
이번이 리더로서 첫 시험이라 생각하고
용기를 내 보세요.”
통화를 마치고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선두에 서야 할 자리에 있으면서도
‘원래는요’라는 말 뒤에 숨어
리더가 아닌 팔로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죽도록 그 팀장에게 말을 꺼내기가 싫었지만,
메신저로 용기를 내어 보냈다.
“팀장님, 1층 스타벅스에서 뵐게요.
기다리겠습니다.”
먼저 내려가 음료 두 잔을 시켜놓고
온갖 경우의 수를 머릿속에서 굴렸다.
안 내려오면?
내려와서 또 소리를 지르면?
내 말마다 ‘원래는요’로 되받으면?
그러던 중, 눈이 퉁퉁 부은 팀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얼굴이 순간 처연하게 보였다.
생각해 보면 2~3년을 일궈온 자리에
불쑥 낯선 사람이 들어와
지금까지 하던 것과 다른 것들을
이래라저래라 한다면
아니꼬울 수도, 같잖아 보일 수도,
억울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는 솔직히 말했다.
“여기선 제가 얼마 안 됐지만,
15년간 학원가에서 일해왔고,
여기서도 도움이 되고 싶어 부원장을 맡은 겁니다.
원치 않게 상황이 이렇게 되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함께 같은 배를 탔으니,
좀 도와주세요.
기분이 상하는 부분이 있으면
조용히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참고하겠습니다.”
팀장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이내, 자신도 지나쳤음을 느낀 듯
“이해해 달라”라고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악수를 하고 학원으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 안은 여전히 정적이었고,
그 후로도 팀장과 나는 썩 좋은 사이는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일을 통해 나는 배웠다.
갈등을 해결하려면
감정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여기는 원래”라는 말은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
‘원래’란, 결국 내가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임을.
그날 이후 나는 리더로서
비로소 한 뼘을 내디뎠다.
모두가 내 뜻을 따르지 않더라도
그 반대조차 포용하며
같은 방향으로 노를 젓게 하는 자리.
나는 그 배의 선두에서
아직 잔잔한 강물 위를
묵묵히 저어가기 시작했다.
언젠가 마주할 큰 물결을
두려움보다 설렘으로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