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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urStellar Jan 18. 2024

시에나 찬가(Song for Sienna)

- 여행에서 얻는 위로

나는 그때 정말 완벽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시에나 캄포 광장에서 한잔의 커피와 포카치아 빵으로 점심을 하고 있었다. 눈앞에는 붉은 벽돌이 촘촘하게 깔린 넓은 광장이 있고, 그 중심에는 하늘 높이 솟은 종탑이 있는 푸블리코 궁전과 오래된 건물들이 광장을 담처럼 둘러서 있다. 화창한 시월의 햇살이 붉은 바닥으로 마구 쏟아지는,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오후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푸른 하늘에는 풍성한 구름이 두둥실 떠다니고 있고, 하늘에서 쏟아진 태양 빛에 오랜 세월을 견딘 중후한 적갈색의 광장 바닥과 건물은 더 이상 색이 바랠 것도 없다는 듯 양 전신을 태양 빛 아래 드러내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끼었지만, 광장은 과다 노출된 사진처럼 쨍하여 눈이 시렸다. 햇살 가득한 적갈색에 시야는 감각을 잃어버렸는지 모든 것이 정지된 것처럼 보였다. 광장 한가운데 오고 가는 관광객들의 모습만 개미처럼 꼬물거릴 뿐, 태양 빛 아래 건물들은 짧고 짙은 검은 그림자를 침묵처럼 바닥에 새겼고, 늘어진 음악 테이프 소리가 끊기 듯 모든 것이 슬며시 정지되었다. 종탑 아래 시곗바늘도 따분함을 못 견딘 듯 멈추었다. 캄포 광장은 태양만이 내리쬐는 정적만 가득한 시간이 멈춘 공간이 되었다.


광장에는 물속에 자맥질했을 때 들리는 환청처럼 일렁이는 소리와 햇살만 가득하다. 태양은 소리 없이 광장으로 하염없이 마구 쏟아졌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햇살은 붉은 광장을 비추었을까? 관광객이 거닐고 있는 광장에서 몇백 년 전의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군주들이 백성을 모으고 호령하였을까? 신에게 기도하기 위해 차가운 새벽 공기에 사람들이 이 광장을 지났을 갔을까? 전쟁에 나가는 사랑하는 이를 보내는 이별의 광장이었을까? 오랜 세월을 겪고도 사람은 달라졌지만, 광장은 유구하고 햇살은 여전하다. 광장 바닥에 박힌 벽돌은 지난 이야기를 틈 사이에 저들만이 아는 이야기를 빼곡히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광장을 나와 거리를 배회하였다. 집과 집이 연결되어 담이 되고 벽이 된 좁은 골목을 돌고 돌았다. 골목 사이 두고 집은 계속 이어지고, 좁다란 하늘이 빼곡히 골목에 내려왔다. 길모퉁이 어디에선가 바구니를 든 중세 시대의 여인이 바쁜 걸음을 걷고 있다. 검은색 후드 복장의 수도사 한 무리가 어디에선가 튀어나올 것 같다. 어쩌면 그들이 사는 곳을 낯선 내가 무례하게 침입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한평생을 살았을까? 암흑의 시대라고 하는 중세 보통 사람의 삶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신 아니면 군주에게 저당 잡힌 삶이었을까? 그러한 삶은 지금의 삶보다 객관적으로 열악한 삶이라고 단정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삶의 모습이 있는 것인지. 별로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갑자기 놀란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을 걸었을 몇백 년 전의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삶은 시간을 따라 연속적으로 이어져 왔을 터인데, 아는 것이 없는 것을 보면 시간이란 연속적인 것이 아닌, 어느 순간 난간을 뛰어올라온 것처럼 갑자기 도약하는 것 같다. 그러고는 지난 세월을 한 번에 잃어버리는 것 같다. 정작 같은 공간에 있지만 시간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 길을 걸었던 이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느낌이 묘하다.


미로 같은 벽으로 둘러싸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이어지고 이어지고 해서 오늘까지 왔다. 그 당시 이 땅에서 붉은 벽돌로 집을 집고 살던 사람이 있었고, 또 바다 건너 멀리 어떤 곳에서는 흙으로 집을 집고 살고 있었다. 같은 시대 다른 공간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그러한 존재가 있음을 상상조차 못 한 채로 살아, 시간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영원히 다르게 존재하는 공간이었지만, 몇백 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 다른 공간의 존재했던 나라는 사람이 여기 이 공간에 왔다. 한반도라는 공간에 살던 이가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시에나에 와서 이 길을 걷는다. 몇백 년 전 서로의 존재도 몰랐던 이들이 살았던 이곳을, 또 내가 살았던 곳을 전혀 몰랐을 이곳 사람들이 걸었던 이곳을, 나는 걷고 있었다. 시에나 여행은 평행선처럼 분리되었던 나의 시공과 그곳의 시공을 나로 인해 하나로 묶는 행위였다.


그리고 나는 지금 피아노를 치고 있다. Song for Sienna. 시에나 찬가를 연주하면서 시에나에 대한 추억을 되새겨 본다. 시에나는 충분히 찬가를 부를 만한 곳이다. 푸른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곳, 저 멀리 언덕을 지키는 사이프러스가 아련한 곳, 고색창연한 벽 사이 작은 골목을 걸을 수 있는 곳, 옛사람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곳, 그곳이 시에나이다. 시에나는 삶의 한순간을 아주 아름답게 만드는 곳이다. 삶의 한순간, 시간이 주는 위로를 느끼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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