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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온 Apr 19. 2018

밑지기

D-56, 녹색당 지방선거 대작전 9일차

오늘의 일지는 잡담이다.


며칠전 동네 미용실에서 머리를 까맣게 염색하며 꾸벅꾸벅 졸았다. 미용실 의자에 앉자마자 긴장이 풀리면서 잠이 쏟아졌다. 꼭 필요한 말 외엔 아무 말을 하지 않는 미용사 선생님이 내가 해드뱅잉을 해대며 본인의 작업을 방해해도 집에 갈 때까지 핀잔하나 주지 않아서 감사했다.


주로 일요일에 갔던지라 tv엔 주말드라마가 틀어져있었는데 이날은 jtbc 뉴스룸이 나오고 있었다. 김기식 금감원장 건이 실시간으로 보도되며, 내가 머무르는 동안 선관위 심의 결과가 나오고 김기식 사퇴가 발표됐다. 선관위에서 낸 두 장짜리 문서를 받자마자 기자가 차마 살필 시간도 없이 실시간으로 보도를 했다. 문서 단어 찾기하는 것처럼 문장의 마지막만 확인해 손석희 앵커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었다. 졸면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동시에 딴 기억이 떠올랐다.
 

중학교 1학년 1학기 때 도덕시간 과제 때문에 부엌에서 바쁘던 엄마한테 무슨 질문을 했다. 엄마가 나를 흘깃 보고 답을 한 게, “네가 조금 손해본다는 생각으로 살아라” 였다. 갸우뚱하며 공책에 받아적고 학교에 갔다. 초등학교 1학년 1학기 생활통지표에서 “다소 이기적인 면이 있음. 친구를 배려하려 노력바람”에 충격받은 엄마 표정을 본 이후로 또 한 번의 잊히지않는 모먼트. 손해보지 않도록 행동해야 자기 앞가림 잘하고 똑똑하고 잘난 거 아닌가? 엄마는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한 걸까? 내게 필요해보이니까 했겠지. 서로 바빠서 긴 설명은 없었고 나도 묻지 않았다.


 후로 그 말을 곱씹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1도 손해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일상적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손해일까, 어디까지가 조금 손해일까, 스스로와의 무수한 타협과 고민의 순간들이 많았다. 계산서 속 항목은 다양했다. 돈, 시간, 에너지, 양심 그리고 사랑의 감정까지. 참 웃기다. 나는 온갖 계산에 젬병이다. 계산도 잘 못하면서 손해볼 것 같으면 귀신같이 예민해진다. 밑질 게 뻔한 상황에서 의연한 척 하느라 더 피곤하다. 김수영 시인이 고궁을 나오며 비겁함을 자책한 게 내 얘기 같았다. 바보같은 고집과 자존심 싸움, 현명하지 못했던 결정에 후회도 많았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이 후회하게 될까.


당시엔 손해가 아니라 여겼는데, 지나고나니 손해인 것도 많았다. 당시엔 손해라고 여겼는데, 지나고나니 아닌 것도 많았다. 엄마가 손해보는 마음으로 살아라 했던 게 실은 손해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었던 것일까. 어떤 경험을 피해나 상처로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힘을 기르는 훈련. 시간을 내다보고 통찰력을 갖는 훈련. 잘 안 된다. 겁이 많은데 욕심도 많아서 손해보기가 싫다. 솔직히 손해 안 보고 살고 싶다. 그런 삶이 행복할지는 모르지만.


나와 영상물 취향이 비슷한 누군가의 추천으로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1999년작 <일렉션>을 봤다. 재밌었다. 조금씩 다 못난 사람들. 경멸과 질시, 복잡한 욕망과 우연. 세상이 진짜 그러니까 영화가 하나도 과장 같지가 않았다. 소설 아닌 현실에선 1인칭 시점 뿐이니 내 기준에서 정직도 정의도 그 자체로 100퍼센트 선이 될 수 없다. 그러니 자기 원칙을 지키며 사는 게 중요하다. 수많은 변수들로 일이 꼬여도, 자기가 자초한 손해는 납득할 수 있을 테니까.


아무튼 엄마가 해준 수많은 말들 중에 유독 기억나는 말이라면 뭔가 의미가 있겠지. 계산이 필요없는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다. 계산하는 걸 아예 까먹었다가 돌아보면 밑지는 일들이어서 내 인생의 밸런스 시트 노답이어도 나름대로 즐거우면 됐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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