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원들께 드리는 편지
안녕하세요.
저는 2016년부터 2018년 가을까지 4기 공동운영위원장을 맡았던 김주온입니다. 드디어 이렇게 세계녹색당 대회와 당대회가 열렸네요. 이렇게 뜻깊은 자리에서 이야기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이 자리를 만들어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긴 시간 열악한 상황에서 얼마나 고생하며 준비했는지 알기에.. 더욱 감격스럽습니다. 특히 국제위원회 이수희, 이철승 두 분 위원장님께 크게 빚진 마음입니다. 그만두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을 텐데.. 개회식에서 두 분의 연설을 들으니 한국녹색당이 정말로 이 자리를 만들었구나 하는 실감이 나서 울컥했어요. 고맙습니다.
저에게 글로벌 그린스, 세계 녹색당 대회는 각별합니다. 운영위원장 임기 중이던 2017년에 영국 리버풀에서 제4차 대회가 열렸거든요. 한국에서는 탄핵과 조기대선으로 인한 대통령 선거 운동이 한창이었고요. 저희는 여러 사정을 고려해서 당시 대선엔 후보를 내지 않기로 했었습니다.
우리의 선택이 적절했는지와 별개로 일단은 후보가 없다 보니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는 대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해서 당원들의 기운이 빠져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치연합 혹은 선거연합이라는 선택지를 두고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저 개인으로선, 임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폭풍 같은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어요. 이 정도로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을 맞닥뜨릴 줄 알았다면 운영위원장에 출마했을까 싶을 만큼… 몰랐으니까 했겠죠? 후회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역량 및 경험 부족으로 느꼈던 답답함 어려움 막막함 두려움은 오롯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런 시기에 거길 가는 게 맞나, 복잡한 심경으로 출국하게 되었죠. 결과적으론 임기 초반에 글로벌그린스 총회에 참석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돌파구가 되었어요.
정당 설립 자체가 쉽지 않은 곳부터 녹색당 의원, 장관 그리고 대통령이 있는 곳까지 다양한 환경에서 분투하고 있는 "녹색당들"을 만났습니다. 한국 사회의 정당 스펙트럼 속에서만 우리를 두고 보는 게 아니었어요. 좌우 이념으로만 구분하는 1차원의 직선 위가 아니라, 공간축과 시간축을 도입해 입체적으로 보게 되니 시야가 달라졌습니다.
글로벌그린즈 공동의 긴 역사에서 우리는 어디쯤일까 좌표를 가늠해 보며 지난 시간 얼마만큼 왔고, 어디로 가야 할지, 유동적인 상황 가운데 무엇이 중심이 되어야 할지, 고민해 볼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치를 펼칠 기회는 반드시 온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구겨지지 않은 마음으로 야심차게 지방선거를 준비하고 임기를 끝까지 마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 당원들과도 이 경험을 꼭 공유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한국녹색당이 다음 대회를 유치하려고 국제위 멤버들과 열심히 제안서를 쓰고 회의에 참석하며 준비해 온 자리가 지금 여기입니다. 여러분은 이곳에서 무엇을 느끼고 계실지 궁금합니다.
리버풀 총회 기간 동안, 스스로에게 반복해서 물었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 질문을 이번 총회를 준비하며 당원들과도 나누고 싶었어요.
"나는 왜 녹색당원인가.
우리, 녹색당원들은 어떤 정치를 해야 하는가.
이 시대는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우리에게는 어떤 힘이 있는가"
작년 말 녹색당 정치학교에 강사로 초대받아서 그간의 활동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녹색당과 나의 관계에서, 나의 정체성은 어떻게 변해왔는지도 성찰하고요.
2016년 총선에서 비례대표 후보로 나선 이후, 곧바로 공동운영위원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당원들께 정말 뻔뻔한 이야기를 했었거든요. 여성 청년 대표인 나의 성장이 녹색당의 성장일 거라고. 그러니 도와달라고. 그땐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던 것 같아요.
녹색당과 나의 정치적 야심 사이에 모순이 없다고 생각한 것인데 정말 오만했지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무엇하나 혼자서 할 수는 없다는 걸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모였다는 걸 실감하는 시간이었어요.
저는 녹색당에서 조각 나있던 여러 정체성이 통합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느낌 같은 것이지요. 활동하는 동안 내가 가진 것을 내놓기만 한 게 아니라 녹색당이 나를 채워주기도 했구나.
녹색당과 나는 호혜적 관계에 있었구나 깨달았습니다.
때론 이 공동체가 내 마음을 조각내기도, 나 역시 누군가의 마음을 후벼 파기도 했지만요. 이상하게도 떠나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더라고요. 내가 앞으로 어떤 역량을 더 키워야 도움이 될까.. 그런 고민을 하게 하더라고요.
정당활동이란 도대체 뭘까요?
왜 이런 걸까요?
녹색당 활동은 제게 다른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을 가르쳐 줍니다. 좋은 것도 괴로운 것도 아주 진한 농도로요. 살면서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저에겐 그런 게 동력이 되고, 삶이 의미 있다고 느끼게 만들어요. 그래서 활동하는 게 힘들어도 달콤했습니다. 정말 어이없죠? 희망이 안 보이는 시대에 아주 무서운 중독이에요. 조심하세요.
“우리는 ‘녹색당’이라는 작은 씨앗입니다. 이 씨앗을 싹 틔워 인류가 지구별의 뭇 생명들과 춤추고 노래하는 초록빛 세상을 만들려고 합니다.”
저를 녹색당으로 이끈 우리의 강령을 볼 때마다
녹색당이라는 씨앗이 매번 척박한 땅에 떨어져 말라죽지만은 않기를, 그중 어떤 씨앗은 좋은 흙을 만나 뿌리를 내리고 발아하고 가지와 잎을 내고 무럭무럭 자라기를, 매 순간이 그런 과정이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하게 됩니다.
이 마음이 사랑이 아니면 뭘까요?
내 마음을 순식간에 충만하게 만들기도, 갈가리 찢을 수도 있는 그 감정. 당원들의 삶에서 이런 마음을 확인할 때마다 조금 울고 싶어집니다. 저는 우리가 이 감정을 더 많은 시민들을 움직이는 힘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녹색당이 어떤 정치적 상황에서 태어났는지는 대부분 아시겠죠. 2011년. 너무나 충격적이었던 후쿠시마 핵사고에도 불구하고 ‘탈핵'을 이야기하는 정치세력 하나가 없던 시절. 당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태양과 바람의 정당'이 기적적으로 창당했습니다. 그 뒤로 산을 넘듯 여러 고비를 하나하나 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23년. 오염수 방류라는… 아직도 믿을 수 없는 이 상황을 마주합니다. 조천호 박사님 책으로 바닷물이 어떻게 온 지구를 순환하는지 공부했었는데. 이걸 이해하지 못한 정치인들이 결국 기후위기도 부정하는 거겠죠.
녹색당 강령에는 이런 문장도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과 함께, 공기의 순환이나 에너지의 흐름, 그리고 생명의 고동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의 변화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모든 게 경제적 수치로 계산될 수 있어야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사회에서 녹색당이 기성 정당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정치를 하려 한다는 걸 느낄 수 있는 문장이에요.
한국녹색당의 역사는 어떻게 쓰일까요?
우리는 역사 속에 어떻게 기록되고 싶은가요?
나아가 기후위기 시대에 인간의 역사라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 녹색당의 정치가 역사에 새기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진정성과 실력이 될 녹색당만의 고유성,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망가뜨릴 수 없는 힘은 무엇일까요?
여전한 제도적 한계 속에서 어떤 정치적 공간을 만들기 위한 목표를 가져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외부의 압박에 단순히 반응(reaction)하는 것을 넘어, 우리 안에 깊게 자리한 열망으로부터 시작하는 행동(action)을 기획할 수 있을까요?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조직문화를 추구해야 할까요? 방어적이지 않으면서 성찰적인 배움의 장을 만들고, 모든 경험으로부터 함께 배우는 태도를 촉진하려면 어떤 이야기를 공유해야 할까요?
여러분은 녹색당 활동하면서 제일 힘들 때가 언제인가요? 저는 지난한 시간 속에서 뭔가 되긴 하는 걸까 하는 회의감이 들고,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에 비해
현실이 너무나 초라해 보일 때였던 것 같습니다.
2년의 임기 동안 모든 걸 쏟아부어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 어디로 갔을까 싶었을 땐 허무했어요. 이것도 오만이었습니다. 고작 2년 갖고서 뭘 얼마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건지.
그런데 또 한편 2년은 참 긴 시간이에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지 아직 1년밖에 안 됐다는 걸.. 생각해 보세요. 그동안 녹색당이 만난 사람들,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은 씨앗들, 그리고 내 안의 변화. 희망을 믿게 된 순간들을 더하는 것. 그게 계속 살아가고 활동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잘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지만 계속하고 있다는 것,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그게 우리의 힘, 우리가 가져야 할 자긍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포기하지 않았기에 오늘과 같은 순간도 있고, 서로가 있는 것이겠죠.
우리가 이해하고 응답해야 할 정치적 갈망, 우리가 보여줘야 할 정치적 직관, 우리의 정치적 힘으로 끌어안아야 할 가치와 신념들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고 과감하게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한동안 김연경 선수 덕질을 열심히 했어요. 배구 경기장도 처음 가보고 그랬는데요. 올해 2월에 리그 1위를 달리던 현대건설과 붙은, 중요한 승점이 걸린 경기를 보러 갔습니다. 그날 김연경 선수가 작전타임에 동료들에게 한 말이 있어요.
“어려울 거 알았잖아. 어려울 거 알았잖아. 지금이야.”
우리도 그렇게 서로를 도닥였으면 좋겠습니다.
어려울 거 알았고, 나의 자유의지로 기꺼이 그걸 감수하고자 했더라도 결코 쉽지 않은 길을 함께 걷고 있잖아요.
서로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내면서, 어두울수록 더욱더 꺼지지 않는 불빛이 되어 나아갑시다. 태양과 바람의 에너지로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