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억에 기대어 살아가니까
추억을 떠올린다는 것은 같은 공간에 서로 다른 필름 여러 장을 번갈아 대보는 느낌을 준다.
혼자 걷던 거리인데, 어느새 남편과 아이들이 저만치 뛰어가고 있다.
사계절을 거쳐가는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다. 오고 가는 사람만 바뀐다.
내가 과거의 한 시점에서 그곳을 걷는 동안, 미래의 장면을 예측이나 할 수 있었을까?
현재를 지나가는 이 순간에도 새로운 장면을 담은 시간들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을 것이다.
어렴풋이 그려볼 수도 있고 꿈꿀 수도 있겠지만 구체적으로 예측하기는 어려운 시간들일 것이다.
'내 삶이 이런 방향으로 흐를 줄 전혀 몰랐어'
가끔 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이야기 위에 또 다른 이야기를 쓴다.
그리고 과거가 된 이야기들은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그리움이 된다.
그리움 덕분에 현재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때로는 그리움을 원동력으로 미래에 대한 열정을 불 지피 우기도 한다.
정말 좋아했던 장소를 다시 가기 위해 오늘을 더욱 열심히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추억을 많이 만드는 것이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소중한 기억들은 비옥한 토양이 된다.
삶의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나의 영혼이 굳건히 발을 딛고 서 있을 수 있게 한다.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끊임없이 성장하게 해 준다. 비바람이 불어서 흔들리고 쓰러져도 결코 꺾이지는 않는다.
과거의 기억들 안에서 내가 잘했던 일들, 무모하게 도전했던 일들, 자유롭게 뭐든지 다 해낼 수 있었던 시절들을 떠올린다.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고, 그 시간에 잠시나마 머문다. 길을 잃었더라도 나 자신을 찾아내게 만들고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알 수 있게 된다.
사랑받고, 사랑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어두운 터널을 걷고 있을 때에도 수많은 추억이 희망이 되어 묵묵히 걸을 수 있는 용기를 준다. 걷다 보면 햇살이 가득한 공간이 나올 것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경험은 시간과 함께 인생의 최고의 자산이며,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때에도 모든 것을 다시 되찾을 수 있게 만든다. 특히 젊은 시절에는 경험을 축적하는데 자원을 투자해야 한다. 견문을 넓히든, 무언가를 배우든, 다양한 사람을 만나든, 고민만 하고 있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걸 시작하면 좋다.
인생은 절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하고 있는 일이 어떤 목적지로 데려다 줄지 아무도 모른다. 엉뚱한 곳에서 걷고 싶은 길을 만나기도, 우연한 기쁨을 마주하기도 한다. 큰 청사진은 그리되 세부사항은 매일 엉망진창 좌충우돌 닥치는 대로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어도, 내면에 탄탄한 지층이 차곡차곡 쌓인다.
그렇게 길을 정신없이 걷다 보면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어디로 향해가고 있는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그동안 나이는 헛먹지 않았나 보다. 이제는 그런가 보다 하고 툭툭 털고 ‘그다음은 어디로 가면 될까’를 생각한다. 그냥 시간을 흘려보낸 게 아니라면 그 과정에서 누구나 다 나름의 여행의 노하우가 생긴다. 몸과 마음도 가볍게 출발하고, 짐도 가볍게 챙기는 습관이 몸에 베인다. 필요를 초과하는 것은 피로를 유발한다는 것을 경험으로부터 알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가 클리셰가 아니라 진짜로 그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을 때 한숨을 푹푹 쉬고 마음속으로는 욕을 연신 내뱉으며 신세한탄을 하더라도 버티면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해야 할 일들을 하며 견딜 수 있다. 뿌연 안개로 앞이 잘 안 보여도, 너무 어두워 십 미터 앞까지만 보이는 깜깜한 밤이라도, 나의 기억들이 내비게이션의 목소리가 되어 더듬더듬 따라갈 수 있게 해 준다.
나는 연간 계획을 세울 때, 놀 계획부터 배치한다.
공휴일이 언제인지, 휴가는 언제 낼 수 있는지 상의한다. 늘 가서 편안한 여행지도 고르고, 새로운 장소도 물색해 본다. 미리 숙소를 예약하고 관광지 티켓도 할인받을 수 있을 때 미리 구매한다.
설레는 여행일정을 바라보며 나머지 시간을 달린다.
일할 때는 열심히 일하고, 놀 때는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놀고 싶다. 물론 그게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 반대로 되는 경우도 많지만 워라밸은 일 년 단위로 계획한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내려놓는 연습을 한다.
몇 박씩 여행을 가지 않더라도 매일 새롭게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기도 한다.
하루를 계획하며 가볼 장소를 검색한다. 점심 식사를 할 메뉴와 카페를 정해 보기도 한다. 집 앞 도서관이라도 일상의 영감을 주는 책에 빠져있다 오면 남은 하루에 임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주말의 이른 아침에는 커피를 마시러 일부러 멀리까지 걷고 오기도 한다. 운동과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왠지 이날만큼은 내가 매일 조깅을 하는 부지런한 사람 같아서 상쾌하기까지 하다.
가족들과 가까운 곳에 자연을 볼 수 있는 곳에 다녀온다. 공원도 가보고, 박물관의 잘 꾸며진 정원도, 산에 폭 싸여있는 사찰도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매일이 너무 비슷하다. 하루의 패턴은 무한 반복되는 것 같은데, 피로가 풀리는 것보다 쌓이는 속도가 더 빠르다.
나이가 들어가며 시간이 정말 순식간에 지나간다. 하루는 긴데, 일 년은 어떻게 이리 금방 지나가는지 모르겠다. 특히 이 주제는 여러 분야에서 연구된 주제인데, 대표적인 이유는 경험이 줄어든다는 점과 주의와 집중이 변화한다는 점이다.
젊을 때는 처음 겪는 일과 자극이 많아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 매일 새로운 것들을 접하고 경험하기 때문에 365일이 다채롭게 채워진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일상이 반복되고 익숙한 일들이 많아져 뇌가 자극을 덜 받게 되고, 시간 감각이 빨라진다. 기억에 남는 사건이 적어 시간의 흐름이 덜 인식되기도 한다.
게다가 일상에 대한 기대감이나 긴장감이 줄어들면 시간 감각도 둔해진다는 것이다. 참으로 서글픈 해석이다. 그래서 더더욱 매일 조금씩이라도 새로운 경험으로 하루를 채워가는 것이 필요하다.
매일 비슷한 순서로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면서도, 그 방식이나 장소를 달리 할 수도 있다. 먹는 것도 늘 먹는 것이 아닌 안 먹어본 것도 도전해 보고, 신메뉴를 시켜보고, 평소에 가지 않던 곳을 선택해 본다. 실패했다 한들, 적은 기회비용으로 경험을 샀으니, 다음번에는 선택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시간을 들여서 나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시공간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간혹 가다 추억이 가득했던 장소가 없어지기도 한다.
힘들었던 시기, 마땅히 갈 곳이 없어 가깝기 때문에 늘 찾았던 장소, 지친 마음을 이끌고 가서 휴식을 취하며 마음을 달랠 수 있었던 곳, 지금보다 더 어렸던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모습과 더 젊고 생기 있었던 나의 모습이 가득한 공간, 가족들과 즐거운 기억을 만들어왔던 시간들, 그런 곳이 이제 영원히 나의 기억 속에만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무척이나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괜스레 눈물이 나기도 했다. 그 시절을 지나오던 나의 초췌한 모습과 외로움과 고단함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고 있으니 안쓰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장면이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는 미화되는데, 아마 현재 서있는 곳에 어느 정도 만족을 하고 안도감을 느끼기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리적인 공간까지 사라졌기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완벽한 과거가 되면서 마치 강제로 인생의 다음 챕터를 열고 나아가는 느낌이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고, 우리 모두 달라졌고,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고 일어서서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 같았다.
과거의 기억이나 영광에 감상에 젖어 매몰되거나 머무르는 것도 여행자의 임무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이라는 최종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가 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오직 신만이 알고 있는 일, 이왕 여행의 기회가 주어진 것, 과거에 머무르지 말고 남은 시간에 세상을 충분히 경험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가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오늘도 작든 크든 일상 속에서 추억을 쌓아 올리고, 삶을 여행하는 여행자의 본분을 다한다. 오늘 써 내려간 시간은 작은 별이 되어 앞으로 걸어갈 때 안내를 해줄 것임을 알고 있기에, 늘 그렇지는 않더라도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시간을 채워가려고 노력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