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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른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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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정 Jan 07. 2018

어른 연습

믿음이 깨어졌을 때 다시 시작되었다.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것도 많았다. '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말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떠한 시도도 해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살면서 '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생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내게 인생은 게임 단계 하나씩 클리어해 나가는 성취감 가득한 도전의 현장이었으니까. 


지방 사립대지만 당시 지역 내에서 꽤 괜찮은 학과를 나왔던 나는 토익 900점 이상, HSK 고등 9급, 어학연수, 교환학생, 자원봉사 경험까지 두루 갖추었다. 4학년 1학기 때 평점 A+로 1등 장학금을 받은 후, 마지막 학기는 모든 시간을 취업 준비에 할애했다. 아침 8시까지 학교에 가서 영어 스터디를 하고, 학교에서 취업 원서를 쓰다가 점심시간이면 혼자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은 후, 저녁이면 취업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면접 준비를 했다. '목표 달성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노력이 부족하다'라는 것이 내 철칙이었으니까. 그런데 나보다 학점과 영어성적도 낮고,  대외활동도 하지 않은 학과 남자 선배가 대기업 증권사에 족족 붙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모의 압박 면접을 진행하며 남자 선배들로부터 내게 돌아오는 피드백은 "지나치게 말을 잘하고 똑똑해 보여서 부담스럽다"였다. 대신 같은 학과의 얼굴이 예쁘장했던 친구는 모의 면접에서 대답을 제대로 못해 웃음으로 무마했는데 선배들은 "순해 보여서 좋다"라는 긍정적인 피드백 일색이었다. 


4학년 1학기 때 학과 1등을 해서인지, 간혹 학과 사무실로부터 전화가 오곤 했다. 취업 제의였다. 그러나 내게 들어온 취업 제의는 건설사 여비서, 혹은 여행사 직원 등이었다. 두 개의 직업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만, 그 취업 제의가, 나의 성향, 경험, 그리고 특기를 고려하여 들어온 제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학과에서는 한 명이라도 빨리 취업을 시켜 실적을 내고 싶어 하니 내게 전화를 했을 것이고, 나는 내가 생각하던 방향과 다른 오퍼가 들어와 매번 거절을 했다. 지속적인 거절을 하다 보니 학과 사무실에서 살짝 짜증이 났나 보다. "대체 얼마나 좋은 곳으로 가려고 해?"라는 우려와 질책이 뒤섞인 질문을 듣고 말았으니까. 


100번 정도 지원서를 쓰고 5번 정도 서류 통과를 했다. 그러나 적성검사와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지고 말았다. 한 번은 모 대기업 적성검사를 치기 위해 KTX를 타고 상경했다. 당시 인적성 시험을 치러 서울에 가게 되었다는 내 소식을 들은 남자 선배들은 서류 통과만으로 기적이라며 놀라워했다. 왕복 10만 원 정도의 차비를 내어 시험을 치러 갔지만 면접비나 차비는 제공되지 않았다. 어차피 대부분 지원자들은 서울에서 이미 학교를 다니고 있는 친구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일 거다. 서울에 연고가 없어 비싼 차비를 내어 당일치기로 시험을 봐야 하는 것은 개인 사유 밖에는 안되었다. 시험 문항을 보며 해당 업무를 잘 해낼 수 있는 능력과 성향을 가진 사람을 공정히 가려내기 위한 항목으로 이루어졌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관건은 유사 시험 문항을 얼마나 체계적으로 준비했는가였다. 인적성검사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던 나는 당연히 낙방하고 말았다. 


그때 처음 깨달았다. '성취'와 '노력'은 꼭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변 친구들이 여유롭게 취업 준비를 할 때 전략적으로 한 학기를 통으로 비워 취업하기 훈련에 '올인'했던 나는, 보수적인 남성 위주 조직 문화에서는 말을 잘하는 것이 지나치게 똑똑해 보여 건방져 보일 수도 있다는 것과, 남부럽지 않은 스펙을 쌓아도 지방 사립대 여학생이라는 이유로 내 지원서가 휴지통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목표 달성을 하지 못한 이유는 노력이 부족해서다'라는 내 인생의 모토가 무너지는 순간이었으니, 내가 절대적으로 믿었던 진리가 무너지는 경험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내가 오랫동안 숭배했던 종교가 사실은 사이비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정도의 충격이랄까. 그러나 이 혹독한 경험을 통해 내가 새로이 깨닫게 된 진리가 있다면 인생은 내가 계획한 단계별로 성취해 나가는 게임이 아니라는 것, 목표를 이루지 못하거나 혹은 목표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노력이 부족한 개인의 탓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상현실에서는 1단계를 통과하면 게임에 적응할 수 있게끔 난이도가 점점 높아지는 2단계, 3단계 스테이지에 진입하지만, 현실에서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1단계에서 갑자기 5단계로 내던져지기도 하고, 경제적, 사회적 이유로 내 능력을 인정 못 받을 때도 있다. 뒤늦게서야 내 인생의 두 번째 깨달음을 얻었던 이때가, 본격적인 어른이 되는 연습의 시작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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