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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웃클라쓰 Jul 08. 2020

어벤저스가 '어벤저스'한 이유?

어벤저스가 목숨 걸고 싸운 진짜 이유

여러분은 어떤 소중한 것을 위해 목숨을 걸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사람은 때로는 어리석어 보일 정도로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걸기도 합니다. 오늘 살펴볼 우리의 영웅 ‘어벤저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웅 어벤저스, 그들은 도대체 왜 타노스와 목숨 걸고 싸운 걸까요?      


※ 영화 '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와 '어벤저스 : 엔드게임'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난 글을 보고 오시면 글을 이해하시는 데 더 도움이 됩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타이탄에서 타노스와의 결전을 앞두고 타임스톤을 이용하여 미래의 가능성들을 내다봅니다. 그 결과 어벤저스가 타노스와 싸워 이길 확률이 무려 천사백만육백오 분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죠. 로또가 당첨될 확률이 대략 팔백만 분의 일이라고 하니, 로또 맞을 확률보다도 어려운 확률을 두고 어벤저스는 목숨을 걸고 싸운 겁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셨을 것 같나요? 말도 안 되는 확률 앞에서 웬만한 사람이라면 포기했을 법도 한데, 그러나 어벤저스는 끝까지 싸움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미래를 보는 중이다


분명 이들이 이토록 처절하게 싸우는 이유가 있을 텐데요. 오늘은 어벤저스의 생각과 한 철학자의 철학을 연관 지어 살펴보면서, 어벤저스의 생각도 한 번 이해해보고 지난 글에서 살펴본 타노스의 생각에 반론도 제기해보겠습니다.     


지난 글에서 '공리주의'를 통해 타노스는 나름의 사상이 있는 빌런이라는 점을 이야기해보았습니다. 자기 개인을 위한 야심도 아니고 자기만 살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우주 전 생물의 보존을 위해 무작위로 50프로를 죽이자는 것은 어쩌면 비교적 공평해 보이는 제안이었는데요. 어벤저스 3,4편의 감독인 루소 형제의 말을 빌리면 핑거스냅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무작위 대상 50프로에 타노스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정의롭고 공평한 타노스를 사사건건 방해하는 어벤저스가 오히려 옳지 못하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차라리 그냥 쿨하게 타노스의 사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면 굳이 쌩고생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이죠. 그러나 어쩐지 타노스의 제안을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무언가 찜찜한 것이 사실입니다. 왠지 모르게 타노스의 생각이 찜찜하고, 반발심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타노스의 제안, 알 수 없는 반발심이 든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 4. 22. ~ 1804. 2. 12)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접하며 선과 악에 대한 감각을 익히게 됩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이야기의 구성에서 ‘권선징악’이라는 요소는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그래서인지 본능적으로 어떤 이야기 속에서 ‘빌런(악당)’이 등장하면 ‘나쁘다’는 인식 또는 감정이 수반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도덕적 판단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임마누엘 칸트입니다. 


칸트는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를 종합했으며, 근대 철학의 중심인물로 평가받는 위대한 철학자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 살펴본 공리주의적 관점과 대비되는 윤리적 입장을 가진 철학자입니다. 칸트의 윤리적 관점을 ‘의무론’이라고 하는데요. 어떤 사상인지 한번 살펴보면서 우리 마음속 찜찜함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한 번 알아봅시다. 아래는 학교 다니며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칸트의 ‘정언명령’입니다.



첫째 명령, “네 의지의 준칙(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

둘째 명령,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도록 행위하라”     


첫째 명령은, 누구든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다른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행동을 해도 괜찮을지를 스로 생각해보고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간의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이 이야기는 얼핏 보면 '모두가 동의하는 선택이면 옳다'는 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선택이라도 모두가 동의하면 옳은 것이 된다는 것과 칸트의 생각은 그 방향성이 다소 다릅니다. 칸트의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에게는 어떤 근본적인 ‘양심’ 같은 것이 있어서 그에 부합하는 선택을 하게 되면 그 선택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더라도 문제가 없다는 생각으로 이해해야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가 영화 속 빌런들이나, 뉴스 등에 나오는 악인들을 볼 때 드는 어떤 부정적 감정들은 이런 데에서 유래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벤저스 엔드게임의 초반부를 보면 가족과 친구를 잃은 사람들이 잿빛 도시 속에서 실의에 빠져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우주 전 생물의 보존을 위해 50%를 없애자는 생각은 계산적으로만 볼 때에는 얼핏 괜찮은 제안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살고 죽는 문제는 사실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그 죽어야만 하는 50%라면? 혹은 내 사랑하는 사람이 그 50%에 해당한다면?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때 타노스의 선택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이에 덧붙여 칸트는 그 원칙이 옳다면 자발적으로 그 원칙을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선택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타의에 의한 것이라면 진정으로 옳다고 볼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선택을 폭력적 방법으로 강요했던 타노스의 선택은 윤리적으로 정당성을 얻기 힘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원칙은, 사람은 그 자체로 목적으로 대우해야 하지, 수단으로 대우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타노스는 영화 내내 생명을 일종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희생을 감수합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사랑했던 딸, 가모라를 희생시켜 기어코 소울스톤을 얻어내죠. 그러나 어벤저스의 생각은 이와 많이 다릅니다. 영화 중간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비전의 마인드 스톤을 파괴하기 위한 논의를 하며, 비전은 자신을 희생할 테니 마인드 스톤을 파괴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캡틴 아메리카는 이렇게 답합니다.      



“우리는 생명을 거래하지 않아, 비전,(We don't trade lives, Vision)”     


(위 대사는 박모 번역가의 대표적인 오역으로도 유명한 대사입니다.) 어벤저스는 생명이란 거래할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생명에도 값어치를 매기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때로는 이러한 감각들이 마비될 때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격으로 환산하고는 합니다. 어떤 스포츠 스타를 평가할 때, “그 선수 몸값이 얼마래?”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입니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에 대해 물어볼 때 “그 사람 연봉은 얼만데?”라고 물어보는 경우들 또한 아마 흔히 보셨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이라는 영역만큼은, 어떤 생명이 어떤 생명보다 가치 있고 없고를 결정할 수 없는 고유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출발해서, 나의 소중한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으로 점점 그 범위를 넓혀가며 고민해보면 생명이라는 것이 건조하게 숫자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겁니다. 칸트는 ‘생명은 거래 가능한 것(수치로 환산하여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며, 하나를 죽여서 다섯 명을 살리자고 제안하는 공리주의적 윤리의 잠재적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타노스가 우주 생명체의 50%를 죽이는 결정을 한 것은 의무론적 접근에서는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측면에서도 타노스의 선택을 반박해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어벤저스가 천사백만육백오 분의 일의 확률에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은 좋은 결과를 예상했기 때문은 아닐 겁니다. 그저 그것이 옳다는 믿음으로 끝까지 도전한 것이겠죠. 공리주의는 행위의 목적을 중시하는 목적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칠게 말해서 결과가 좋다면 수단이 조금 나빠도 상관이 없다는 입장인 것입니다. 그러나 공리주의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결과를 중요시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확신을 할 수 없다는 것이죠. 타노스조차 ‘어벤저스 4 : 엔드게임’에서 50프로를 제거하면 나머지는 잘 살 것이라고 예상했던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는 본인의 입장을 수정하게 되죠. 타노스 조차도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가 어떻게 이어질지 알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난 생명체의 절반을 죽이면, 남은 절반은 잘 살 줄 알았어.

근데 너희가 보여줬어. 그게 불가능함을.

- 타노스, 어벤저스와의 마지막 전투에서


사실 타노스는 과도한 확신에 차있는 존재입니다. 세상에 중2병도 아니고 자기를 필연적 존재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얼마나 될까요? 타노스는 이러한 과도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원칙을 타인에게 폭력적으로 강요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영화 내내 생명조차도 일종의 수단으로 여기는 모습을 보여주죠.      


반면 어벤저스의 선택은 시종일관 타노스와 대비됩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지켜야 할 소중한 것들을 거래의 수단으로 삼으려 하지 않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죠. 위에서 살펴본 캡틴의 대사도 그렇고, 소울스톤을 얻기 위해 서로 희생하려는 호크아이와 블랙위도우의 모습에서도 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핑거스냅을 직접 하겠다고 서로 나서는 토르와 헐크의 모습도 마찬가지이고, 결국에는 영화의 가장 결정적 한 장면에서도 이와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아이언맨의 선택, “I am Iron man”


영화 속에서 천사백만 분 오 분의 일의 확률로 승리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미래는 바로 아이언맨의 희생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아이언맨은 모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희생시키지 않습니다. 어쩌면 아이언맨의 이러한 행동은 오늘 우리가 살펴본 '의무론'의 아주 적극적 실천이 아닐까 하는데요. 아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양심의 방향과 아이언맨의 희생은 그 울림이 같았기 때문에,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더 임팩트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번 시간은 어벤저스의 선택의 배경이 되는 생각에 대해 철학적 탐색을 해보았습니다. 이를 통해 공리주의와 의무론의 차이도 살펴보고, 지난 시간 살펴본 타노스의 선택에 대해 반론을 제기해보기도 했습니다. 글을 보신 분들은 어쩌면 어벤저스를 통해 본 의무론이 타노스의 공리주의보다 더 옳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혹은 여전히, 나는 그래도 공리주의적 관점을 지지한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감히 무엇이 정답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며 끊임없이 어떤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아마 그리고 오늘 살펴본 것과 비슷한 선택의 갈등들을 많이 마주하게 될 겁니다. 이럴 때 철학은 힘을 발휘합니다. 오늘 함께해본 철학적 탐색들을 통해 우리 삶의 선택이 더 나은 방향을 향하길 기대합니다. 



위 내용을 영상화하여 유튜브에 업로드한 것이 있습니다. 같이 보시면 더욱 재미있게 위 주제에 대해 함께 고민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꾸벅)

https://youtu.be/w5xRGVeWR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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