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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웃클라쓰 Jul 17. 2020

영화 '곡성'과 미끼

곡성과 기우(杞憂), 믿음과 의심

※ 영화 '곡성'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기우(杞憂)

우리는 땅, 곧 대지를 딛고 살아갑니다. 너무 당연해서 의식하지 않지만, 사람은 대지와 중력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 이것은 정말 당연해도 되는 것일까요?     


영화 ‘곡성’을 보고 기나라 사람의 고사가 떠올랐습니다.      



기(杞)나라에 어떤 사람의 걱정이 심했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몸을 어디에 피할까 두려웠다. 밤에 잠도 못 자고 밥도 잘 먹지 못하자 이 사람의 걱정하는 것을 불쌍히 여긴 어떤 사람이 타일렀다."하늘은 공기가 차 있을 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 무너질 까닭이 없소. 또 땅은 흙이 쌓인 것이오. 흙이 사방에 가득 차 있어서 아무리 우리가 뛰고 밝고 해도 땅이 움직일 터가 없소. 그러니 제발 그런 걱정일랑 하지 마오."

그제야 겨우 걱정을 안 하게 된 그 사람은 마음을 놓고 잠을 잘 수도 있었고, 타이른 사람도 기분이 좋았다는 이야기다. (익히 알다시피 쓸데없는 근심을 가리키는 ‘기우’라는 단어는 이 고사에서 나왔습니다.)

- 열자(列子), 천서편(天瑞篇)    


기나라 사람처럼 쓸데없는 걱정에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대게 사람들은 기나라 사람의 근심을 가볍게 무시하며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땅이란 너무 당연해서 말할 가치조자 없는 것이다. 중력이란 너무 당연한 것이고 해와 빛과 바람 같은 것은 세상에 너무 당연해서 그 존재를 ‘그냥’ 믿어야 한다.” 그러나 곡성을 보신 분들은 이 ‘그냥’ 믿는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이내 깨닫게 될 겁니다.  

   

영화의 제사(題辭, 책의 첫머리에 그 책과 관계되는 노래나 시 등을 적은 글)로 쓰인 누가복음은 2000년이 넘게 전해져 온 기독교 경서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가 부활 후 자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십자가형으로 구멍이 뚫린 성흔(聖痕, 그리스도가 십자가형을 당할  몸에 생긴 상처)을 만지게 하시며 전하신 말씀이었죠.      



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 누가복음24:37~39, NKRV


영화의 결미에 이르러 사제 양이삼은 예수이기도 한 것 같고 악마이기도 한 것 같은 외지인의 모습에 자신의 믿음을 시험받습니다. 외지인은 자신의 몸에 있는 마치 성흔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며 이삼을 시험하죠. 그러나 이런 절대적 부활의 증표도 외지인의 기괴한 모습 앞에선 그의 믿음에 힘을 더해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곡성은 영화 내내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믿음을 비틀어 버립니다.


외지인의 성흔


이러한 혼란을 겪는 것은 주인공 종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딸 효진을 살리기 위해 사방을 뛰어다니지만 ‘외지인’과 ‘무명’이라는 초자연적인 존재 사이에서 시험받으며 영화 내내 놀아날 뿐입니다. 그런 그가 그들의 존재에 대해 믿을 수 있는 근거는 무성한 ‘소문’뿐입니다. 그런데 이 소문은 제각기 말이 다르죠.    

 

우리가 딛고 있는 대지보다 단단하다고 여겨왔던 복음서도, 죽음을 초월한 부성애도 결코 그들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믿고 있던 무언가가 흔들리는 순간부터 그들은 내내 추락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단순히 그들만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영화 속 인물들이 미끼를 물기 전처럼, 우리 또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던가요?      


간단한 예시로 근래의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인 ‘인권’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인권이란 말 그대로 모든 인간의 권리, 인간은 피부나 성별이나 직위 등으로 서로 차별하거나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는 우리 사회의 기본 원리이자 상식입니다. 그러나 정말 이 인권이라는 게 당연히 존재하는 걸까요? 너무 당연해서, 그냥 ‘믿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당연하게 여겼다면 요즈음과 같이 인종차별 문제로 인해 세계가 떠들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인권이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예수의 성흔처럼 눈에 보이는 무언가 면 어땠을까요? 인권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바 된다면 우리의 ‘믿음’이 좀 더 굳건해지지는 않았을까요?    

 


인권에 대한 개념이 필요 없다거나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믿는 무언가가 사실은 당연하지 않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입장도 영화 내내 혼란스러워하고 헤매기만 하는 종구와 이삼의 처지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영화 내내 끊임없이 시험받는 '종구'


2. 믿음의 대지

기나라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고 싶습니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기원전 4세기경 중국의 사상가 열자(列子)가 웃으며 말한 바 있습니다.     



"천지가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 사람 역시 옳지 않은 것이다. 무너지고 안 무너지는 것은 우리들이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무너진다고 한 사람에게도 일리는 있고,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 사람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므로 생(生)은 사(死)를 모르고, 사는 생을 모른다. 미래는 과거를 모르고, 과거는 미래를 모르는 것이다. 천지가 무너지고 안 무너지는 것은 우리가 어찌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 열자(列子), 천서편(天瑞篇)    


열자(列子) : 기원전 4세기경, 중국 전국 시대의 도가(道家) 사상가


누구에게나 일리가 있다. 외지인에게도 일리가 있고, 무명에게도 일리가 있다. 종구에게도 일리가 있고, 이삼에게도 일리가 있다…     


모두에게 일리가 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사실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혹은 '안다'라고 생각하는 건 아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믿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에 인용한 열자의 이야기는 마치 영화의 줄거리를 알고 있기나 한 듯이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 곡성은 이런 제각기의 ‘일리’들이 모여 모호한 서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실 모호한 수준을 넘어서 비논리적이기까지 하지요. 종구의 꿈과 현실은 영화 내내 어지럽게 교차합니다. 악몽 속에 악몽이 있어 꿈과 현실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무명이 다 죽어가는 일본인을 결국 처리하지 않는 장면, 영화 마지막에 일광이 거리가 가까운 곡성을 향해 달려가는데 동틀 때가 되어서야 도착하는 장면 등. 알 수 없는 사실 또는 거짓들이 어지럽게 나열되어 있습니다. 관객 또한 종구와 마찬가지로 명확한 실체를 알기 어렵도록 이야기가 짜여 있으며, 영화 자체가 어떤 귀신 놀음의 판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감독은 아마 관객 또한 종구와 같은 혼란을 경험하길 원했을 것입니다. 감독은 왜 이렇게까지 우리와 종구의 믿음을 흔들고자 했던 것일까요? 영화 카피처럼 단순히 미끼를 던지고 싶었던 것뿐일까요?     


나홍진 감독은 2016년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곡성을 만든 시작점에 대해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은 피해자에 대한 고민부터였다. '어떻게' 피해를 입었는지에 대한 답은 있는데 '왜' 피해를 입었는지에 대한 답은 없더라. 왜 이 사람이어야만 했는지, 왜 이 피해를 입어야만 했는지. 현실에서는 '어떻게'라는 답에서 충족하는데 '왜'에 대한 질문은 현실 범주에서 생각할 부분이 아닌 것 같았다. 그 순간 공포가 찾아왔다.”
 - 2016.05.19. 노컷뉴스와의 인터뷰 중     
영화 '곡성'의 나홍진 감독


‘어떻게’에 대한 답은 있지만 ‘왜’에 대한 대답이 없다. 이를테면 ‘하필 ‘왜’ 내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해야만 했지?’, ‘왜 우리 어머니가 죽어야만 했지?’ ‘왜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는가?’ 등의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명확한 대답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런 불운에 대해 신의 섭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누군가는 이것은 그냥 너에게 스쳐 지나간 우연일 뿐이라고, 신이 제시한 운명 따윈 애초에 없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이 ‘왜’에 대한 두 가지 대답이 마음에 드시나요?      


신의 섭리라기에는 납득이 되지 않고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비극적인 답변이요. 어떤 대답이건 우리는 그것이 '맞다'라고 확신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결국 ‘어떻게’라는 객관적 사실이 아닌, ‘왜’에 대한 대답은 믿음의 영역에 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 지점에서 우리가 영화에서 겪는 혼란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게 됩니다. 어쩌면 이 혼란을 마주한 순간 감독이 던진 '미끼'에 우린 걸려든 것일지도 모르죠.

   

이 영화에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가 뭘까. 무서운 생각이 든 거다. 인간 존재를 생각하니 가장 밀접한 신이 생각이 났다. 일단 들었던 생각은 이거다. 이 모든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신이 있기는 한 것인가. 실재는 하느냐. 선하긴 한거냐. 바라만 보는 거냐. 도대체 (이 곳은) 왜 이런가. '곡성'은 그런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2016.05.19. 노컷뉴스와의 인터뷰 중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의존하고 있는 어떤 ‘고정된 관념’들이 진실이 아님을 마주하는 순간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그러한 혼란의 한가운데 놓여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요?      


3. 예수와 유대인, 우리

곡성은 성경을 자주 패러디합니다. 감독의 전작인 <추격자>에서 살인범 지영민의 살해 욕구를 예수, 못과 정의 이미지들로 은유하는데 그쳤다면, 곡성에 이르러서는 시작부터 누가복음 24:37~39을 인용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변용해 사용하죠. 사실 패러디를 넘어 곡성이 다루는 주제가 성경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 속 이야기들을 잘 들여다보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신의 뜻인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인지, 선한 일인지 악한 일인지, 광명인지 흑암인지, 단 것인지 쓴 것인지, ‘신을 섬기던 사람들’도 분별하기 어려워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 데살로니가전서2:4, NKRV


예수가 메시아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했을 때, 어떤 이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따른 반면 많은 유대인들은 그를 이단과 귀신, 염병으로 여겼습니다. 그 안에서 유대인들은 많은 혼란을 겪죠. 예수는 유대인들이 옳다고 여겼던 ‘당연함’에 대해 도전한 인물이었습니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 요한복음5:8~17, NKRV


그들의 철저한 믿음에 반기를 들었던 예수의 행위를 오늘날은 의롭다 평가하는 이들이 많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진실과 거짓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고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기들을 위해 이 땅에 온 메시아를 자기들의 손으로 찔러 죽인 것이나 다름이 없었죠. 당시 유대인들이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지도자들은 무고한 사람을 죽인 ‘살인’을 저지른 것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많은 유대인들은 그 행위를 ‘옳다’고 여겼습니다.      


예수와, 유대인. 누가 옳은 것이었을까


예수의 등장 앞에서 혼란을 겪고, 이윽고는 그를 죽였던 유대인들의 행위는 영화 곡성의 말미의 어안이 벙벙한 종구와 가톨릭 사제 양이삼과 겹쳐 보입니다. ‘무명’은 종구를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 종구는 무명의 말이 아닌 ‘일광’의 말을 따르게 되고, 영화는 비극적 결말로 마무리됩니다. 외지인의 정체를 확인하고자 했던 이삼은 외지인의 모습이 악마로 변하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외지인의 실체를 목도한 '이삼'


4. 회색지대

우리는 어떤 믿음의 대지위에 살아갑니다. 오늘은 ‘인권’이라는 예시만 들었지만, 이 외에도 수많은 믿음의 대지들에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딛고 살아갑니다. 얼핏 이 대지는 너무도 견고하고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진실을 더 적나라하게 마주하는 순간마다 때때로 우리의 대지는 무너져 내립니다. 심지어 악마가 신의 모습으로 숭배받기도 합니다. 아니 사실 그것이 악마인지 신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죽음과 파국은 계속됩니다. 악마도 우리가 딛고 있는 대지를 근거로 우리를 흔듭니다. 옳은 길을 제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 속 무명의 마지막 절규처럼, 무력한 외침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영화 '곡성'은 이렇게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에 대한 '믿음의 대지'를 흔들 것을 요구합니다.      


'무명'의 절규


그렇다면 우리도 영화의 결말처럼 혹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유대인들처럼, 선악을 제대로 분별할 수 없는 회색지대에서 늘 방황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영화 '곡성'이 인생에 던지는 하나의 질문이라고 생각했을 때, 또 다른 질문 한 가지를 해보게 됩니다. 이를테면 예수가 옳다는 가정 하에, 예수의 수난 가운데에서 그를 따랐던 어떤 이들처럼, 우리 또한 거침없이 진실을 향해 다가갈 수는 없는 것일까요? 모든 이들이 자신의 믿음의 대지를 근거로 어떤 한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그 현장에서도, 그럼에도 예수를 따랐던 여인들은 과연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요? 만약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해 답변할 수 있다면 곡성이 우리에게 고민하게 한 '미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지는 않을까요?


나홍진 감독 인터뷰)

https://www.nocutnews.co.kr/news/4594591



p.s

- 사실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다 담지 못하고 마무리합니다^^; 다작하겠다는 포부로 브런치를 시작했는데, 일이 많아지니 생각보다 글 쓰기가 쉽지 않은 요즘입니다.

- 본 글은 지극히 주관적인 분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혹여 관련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댓글로 함께 이야기해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번 글도 영상화하여 업로드한 것이 있으니 영화의 영상과 함께 보시면 더 느낌 있게 내용이 와 닿으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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