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진실에 관하여
1.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입니다. 원작 소설의 작가 얀마텔은 이 소설로 세계 3대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2002년에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수상 전 후보군에 있었을 때, 거의 대부분의 출판인들이 예측 자체가 무의미하다며 파이 이야기의 수상을 점쳤다고들 하는데요. 요즈음의 현대 문학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신화와 이야기에 대한 상상이 풍부하게 표현된 점을 높이 산 것 같습니다.
2012년에 공개된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도 원작 못지않은 좋은 평가와 함께 큰 흥행을 이뤘었는데요. 인도산 벵골 호랑이와 어린 소년이 태평양을 함께 표류한다는 신화적인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스크린에 담아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주인공 파이의 고독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환상적인 자연의 아름다움과 태평양의 망망함에 넋을 잃고 빠져들게 되죠. 심지어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여행을 떠나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비현실적으로만 보이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 이토록 사로잡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화의 충격적인 결말은 우리가 본 것이 파이의 상상이나 지어낸 환상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말이죠. 오늘은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통해 ‘이야기와 진실’에 대해 적어보겠습니다.
※ 영화의 줄거리와 함께 영상을 통해 내용을 확인하실 분들은 아래 영상을 시청해주세요!
2. 두 가지 이야기
영화는 두 가지 이야기의 대립을 보여줍니다. 영화 내내 직접 눈으로 보았던 벵골 호랑이와 파이의 이야기, 그리고 병원에서 일본 선박 직원들에게 말해주는 끔찍한 대참사 중 어떤 것을 믿는 게 옳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실제 있을 법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선박 직원들이 수긍한 이야기를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니면 좀 더 나은 이야기라고 느껴지는 파이와 벵골 호랑이의 이야기를 받아들여야 할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영화 전반에 흐르는 테마인 ‘공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공존이라는 테마는 영화 전반에 흐르고 있습니다. 영화의 배경이 프랑스령의 인도 땅이면서 무슬림 문화가 혼재하는 폰디체리라는 점. 파이의 종교가 뚜렷한 구분이 없다는 점. 사실과 환상이 구별하기 힘들게 중첩되어 보이는 장면들을 보시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야기상의 이런 설정들을 눈여겨보면 우리는 두 가지 이야기가 주는 아리송함에 대해 무언가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국이면서 인도이면서 프랑스인 곳이 존재할 수 있다면, 종교도 구별이 없어지고, 사실과 환상의 구분도 불분명하다면, 서로 다른 이야기가 공존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 것일까요?
이 기이한 공존이 석연치 않거나 미신적으로 느껴지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파이의 호랑이 이야기는 현실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가족의 죽음에 실의에 빠진 소년이 사실을 직접 보는 것이 두려워 동물들의 이야기로 포장한 것이다. 그러니 일본 선박회사 직원들에게 한 이야기가 사실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마 일반적일 것입니다. 두 이야기가 공존한다고 보기보다는 한 이야기가 한 이야기에 기생하는 방식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죠. 파이의 아버지가 어린 시절 파이에게 한 말은 이러한 관점에 가깝습니다.
"허황된 전설과 예쁜 불빛에 속지 마. 명심하렴, 종교는 깜깜한 어둠이야"
"세상의 모든 종교를 믿는 것보단, 이성을 믿는 건 어때? 우주를 이해하는데 과학은 수백 년이 걸렸지만 종교는 1만 년이나 걸렸어."
그러나 우리는 ‘이야기’ 그 자체의 특성에 대해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대부분의 이야기가 거짓말, 곧 ‘허구’라는 것을 한 번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소설, 영화, 드라마 등등 세상에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이것은 거의 다 허구입니다. 지어낸 이야기이며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해도 많은 각색과 대역이 존재하죠. 극단적으로 말하면 모두 뻥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분명 이야기란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우리는 여지없이 이야기에 빠져듭니다. 왜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우리는 항상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일까요?
이는 이야기라는 것이 ‘사실’보다는 ‘진실’에 더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이야기는 대게 사실은 아닐 수 있지만 어떤 진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보던 별주부전 이야기를 보시죠. 세상에 말하는 토끼도 간사한 거북이도 없지만 이 이야기는 백성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용궁이라는 부패한 권력에 대한 풍자와 용왕과 재정 대신들을 넘어서는 기지로 함정을 빠져나오는 하층민의 통쾌한 역전을 담고 있습니다. 별주부전은 고대에 입 밖으로 내기 어려웠던 권력층에 대한 어떤 진실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수많은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영화와 드라마들이 존재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별주부전 이상의 어떤 ‘진실’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보여주는 겁니다.
어쩌면, 우리의 진짜 관심사는 늘 ‘진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3. 이야기, 사실과 진실
그래서일까요. 거짓이지만 진실을 담고 있는 이야기는 때로는 세상에 사실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기도 합니다. 이런 ‘사실’이 하나 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어떤 남자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졌습니다. 딱히 병세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장애가 생긴 것도 아닌데 말이죠. 처음에 남자는 시간이 지나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날이 갈수록 남자의 행동이 이상해져 갔습니다. 말은 어눌해져 가고 이해는 더디었으며 하는 행동도 가족들이 이해할 수가 없이 바뀌어갔죠. 남자는 원래 다니던 번듯한 직장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고 가족들을 부양할 수도 없었습니다. 겉보기에는 정상적으로 보였기에 가족들은 이의 그런 행동이 가족들을 부양하는 의무를 져버리고 싶어 연기한 것이라 생각하기에 이르죠. 쪼들리는 생활이 불만이었는지 제구실을 못하는 남자가 불만이었는지 그들은 남자를 내쫓기에 이릅니다. 남자가 이상하게 변한 원인은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구요.
어떠신가요? 뉴스나 서프라이즈 같은 곳에 나올법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금방 우리 뇌리에서 사라질 이야기처럼 느껴지시지 않나요? 어찌 보면 조금 뻔한 이야기이니까요. 그런데 만약 이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해본다면 어떨까요?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한 마리의 벌레로 변한 남자의 이야기. 그렇습니다. 그 유명한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첫 문장입니다. 평범한 회사원이 거대한 갑충으로 변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거짓이지만 우리에게 어떤 진실을 전달하기에는 효과적으로 보입니다. 어떤 이유든 간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제 기능을 못하게 되었을 때, 회사에서 맡은 직무를 못하게 되고, 가족에서 맡은 부양의 의무를 못하게 될 때를 가정해보세요.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대할까요? 그들은 우리를, 아니 인간이 어떤 존재라고 생각할까요? 만약 인간을 그저 고장 나면 바꾸고 갈아 끼울 수 있는 부품으로 생각한다면 어느 날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의 불안은 영원히 이해될 수 없을 것입니다.
카프카는 벌레로 변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어떤 진실에 대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진실성 덕분인지 변신은 세계문학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죠. 서프라이즈 풍의 사실보다 진실을 담은 환상이 세상에 더 영향을 미치는 순간입니다.
“카프카의 가장 분명한 장점은 허용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솜씨이다. 몇 행만으로 그는 영원히 남을 상처를 새겨 넣는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Francisco Isidoro Luis Borges)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기능을 상실한 한 인간의 소외를 카프카는 그저 사실대로만 쓰지 않았습니다. 어떤 진실을 한 남자가 벌레로 변한 이야기로 둔갑시킴으로써 음울한 현대판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죠. 이런 관점에서, 호랑이와 함께 태평양 한가운데를 표류한 소년의 신화와 같은 이야기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배에서 일어난 살해사건과 불행한 조난의 이야기는 사실일지 몰라도 파이 그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말해주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277일간 벵골 호랑이와 함께 긴 여정을 떠난 이야기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이루어낸 파이의 내면과 그를 둘러싼 우주의 진실, 신의 섭리 한 자락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사실을 담고 있는 이야기, 사실은 아니지만 진실을 담고 있는 이야기. 두 가지 이야기가 공존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 같습니다.
4. 이야기와 진실
파이의 실제 이름은 피신 몰리토 파텔입니다. 피신이라는 이름이 영어로 오줌이라는 단어와 비슷해서 놀림이 되자 파이는 당돌하게 자기 이름을 파이라고 스스로 ‘선언’합니다. ‘파이’는 이처럼 스스로의 이름을 스스로가 정하고 이것을 현실 속에 실현시킵니다. 파이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정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주변의 세계와 그 속의 이야기들을 스스로 해석하고 규정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소설가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고는 이렇게 물어봅니다.
“어떤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요?”
그러자 소설가는
“호랑이 이야기요. 그 이야기가 더 나은 이야기에요(the one with tiger. that's the better story).”
라고 답합니다. 왜 소설가는 호랑이 이야기가 더 나은 이야기라고 한 것일까요? 이에 대해 파이는 아래와 같이 답합니다.
“감사해요. 그리고 신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죠.(Thank you. And so it goes wi God.)”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 속에 살아갑니다. 그 이야기 속 진실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어떤 이들은 ‘사실’이 아닌 것들은 가치가 없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단순히 ‘사실’이 아닌 이야기 속 ‘진실’이 갖는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더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제 우리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논쟁들 속에 신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논쟁은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현재까지의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에만 비추어보면 신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사실’적 관점으로만 보면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완전히 허구’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 신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진실’마저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신화와 신에 관한 이야기 속에는 분명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 진실들 속에서 누군가는 신의 존재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파이처럼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가 주의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별주부전과 카프카를 예시로 들어 말씀드렸듯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것의 진실을 강력하게 전달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진실이라는 것이 어디까지나 이야기를 만들어낸 창작자의 관점을 반영한다는 사실도 같이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창작자에게는 진실인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이야기는 진실을 드러나게 하는 역할보다 오히려 진실을 은폐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창작자는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요.
5. 나와 이야기
우리는 이야기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사람마다 누구나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그의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입니다. 같은 일을 겪더라도 누군가는 더 나은 인생을 위한 디딤돌로 여길 수도 있고, 누군가는 더 깊은 우울에 빠지는 늪과 같은 것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맞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을까요? 무엇이 진실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내가 품고 있는 나만의 이야기는 그 창작자가 결국 ‘나’라는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창작자가 나라는 것은 내 의도와 관점 이상으로 어떤 사건을 해석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죠. 내 의도의 그림자 뒤로 진짜 진실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품은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확신하시나요?
오늘은 라이프 오브 파이를 통해 이야기와 진실에 대해 써 내려가 보았습니다. 가족을 잃고 조난당한 소년의 사실적인 이야기와 벵골 호랑이와 277일을 함께 표류한 소년의 허구적 이야기를 두고, 두 가지 이야기와 진실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함께하다 보니 우리는 다시금 우리 자신에 대해 고민해보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파이가 막막한 태평양 한가운데를 건너며 자기의 이야기를 완성해나갔듯이, 우리 자신 안에도 이야기의 대양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작은 나룻배와 노 하나만 가지고 이 대양을 횡단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가리키는 진실, 그 답을 찾기 위해서요. 어쩌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서 멋진 벵골 호랑이 한 마리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