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한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며
한동안 브런치에 글을 쓰지 않았는데 작금의 세태를 보면서 답답함을 금할 길이 없어 담벼락에 소리라도 지르는 심정으로 글을 남긴다.
오늘(글을 쓰는 시점 현재 2월 5일) 안타까운 일이 전해졌다. 한 인터넷 방송 BJ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사정은 이랬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에게 쏟아지는 지나친 악플로 인해 우울증을 앓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몇 달 지나 그의 딸도 그 이후 이어진 스트레스와 우울을 견디다 못해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관련기사링크 : https://www.yna.co.kr/view/AKR20220205049300004)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와 한 유명 유튜버가 원인을 제공했다. 그들은 그녀의 일부 행동을 가지고 그녀를 ‘남혐’으로 몰아갔고 과도한 비난을 쏟아냈다. 이에 대해 그녀는 몹시 억울해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상황이 이 BJ의 극단적 선택에 영향을 주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욕망의 삼각형과 차이 소멸
르네 지라르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 다루면서 인간은 욕망할 줄 모르는 존재이며, 욕망은 모방에 의해 생겨난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욕망의 삼각형’으로 요약된다.
즉 욕망이라는 것이 '매개자'의 존재로 인해 생겨나고 강화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모방을 일으키는 매개자와 욕망의 주체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발생한다. 이 거리가 가까워지면 서로 간의 차이는 점차 줄어들고, 둘 사이에는 갈등적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위에 인용한 기사의 내용이 이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예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전교 2등이 전교 1등을 시기해서 살인했다는 이야기는 개인의 차원으로 보이지만, 이와 같은 현상이 사회 전체로 확산되기 시작하면 사회 전체의 불안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 사회의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젠더갈등'을 들 수 있다. 젠더갈등은 이미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차이 소멸과 갈등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차이 소멸이라는 현상은 다시 말하면 서로가 서로를 ‘미러링’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내가 한 대 맞았으면 적어도 같은 방식으로 상대방도 한 대 때려야 나의 분노는 해소된다. 그러나 문제는 복수는 때로는 더 지나친 형태로 되돌아간다는 데 있다. 이와 같은 복수의 속성 때문에, 차이 소멸에 의한 갈등은 더욱 악화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저희의 유튜브 영상을 참고해주시면 차이 소멸에 관한 르네 지라르의 이론을 더 깊이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 올드보이와 '복수의 역설'
https://youtu.be/UZKqBFzMrcY
문제는 이와 같은 갈등의 심화는 결국 사회의 파국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갈등의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사회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바로 이 문제의 모든 책임을 떠안을 ‘희생양’을 만드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이렇다.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
누군가 희생양이 발생하면, 그제야 사태는 진정되기 시작한다. 갈등은 일시적으로 해소되는 듯하지만, 결국 그 사회는 폭력과 살인의 토대 위에 세워진 사회가 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희생은 주로 은폐되기 마련이고, 폭력적 만장일치에 기초한 사회의 유지라는 이 영원한 악순환을 끊을 수가 없게 된다.
이것이 르네 지라르가 지적한 우리 사회와 문명의 실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폭력적 악순환이 문제임을 알고 있으며 이를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 누구도 무고한 희생양이 생겨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의 양심은 알고 있다.
성별을 갈라치고 세대를 갈라치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런데 최근 보면, ‘세대 포위론’이니 뭐니 하며, 세대 간의 갈등을 의도적으로 조장하는 일부 세력을 보게 된다. 또는 의도적으로 성별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특정 국가에 대한 혐오 정서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표를 얻어 어떻게든 승리하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은 행위는 심각한 역사의 퇴행일 뿐 아니라, 뿌리 깊은 우리 사회의 병폐를 더욱 악화시키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갈등과 혐오의 사회는 반드시 누군가가 죽어야만 유지가 가능하다. 이러한 사회에서 누군가가 죽어나는 끔찍한 폭력은 계속해서 확대 재생산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역주의’라는 망령 때문에 수십 년간 나라가 동과 서로 갈려져서 서로를 혐오하고 차별하며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것을 목도해왔다. 이제는 정치권의 어떤 세력이 나서서 세대를 나누고 성별을 나눠 이 짓을 더 이어가려고 한다.
나는 당장의 정치적 승리 때문에 이러한 짓을 일삼는 이들은 후대에 역사의 대역죄인으로 평가될 것을 확신한다. 지금 우리는 갈등과 혐오가 아닌 포용과 평화를 말해야 하며 이를 우리의 미래가치로 삼고 우리 후대에 이를 유산으로 남겨야 할 책임이 있다. 사회 구성원들의 갈등을 조정해야 할 정치인이라면 이와 같은 일에 더욱 무거운 책임을 가지고 있다. 오늘 같은 끔찍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말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누군가가 죽어야만 하는 이 구조를 해결할 수 있을까?
도대체 우리 사회에 갈등을 조장하고 분열과 혐오를 조장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사탄은 당연히 소멸하지 않습니다. 그는 떨어져서 땅에 머물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전의 사탄은 초월적인 천상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땅에 떨어진 지금은 이제 더 이상 질서의 원천이 아니고 대신 무질서의 원천일 뿐입니다. 사탄이 죽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 반대로, 땅에 추락했기 때문에 사탄은 인간과 훨씬 더 가까워졌습니다.
(...)
바울이 의미하는 것이 아마 그런 것일 겁니다. 그리스도는 사탄의 벽을 건너뛴 유일한 인간입니다. 그는 희생양 시스템, 즉 사탄의 원칙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습니다. 예수의 부활 이후로 그전에는 없던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다리가 하나 생겨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한 발을 딛고 있다는 것과 함께 사탄의 성벽을 없앴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그러므로 이 세상에 뿌리박고서 인간이 지나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해, 사탄의 질서 속에다가 무질서를 놓아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를 통해 스캔들이 왔다』, 88~90쪽)
르네 지라르는 이와 같은 욕망을 조장하는 것을 악마(사탄)로 규정했다.
우리는 지금 ‘악마'와 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