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은 이유가 없다.
혹시 영화 올드보이가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 대한 재해석이라는 걸 아시나요? 영화의 주인공 ‘오대수’는 ‘오이디푸스’가 변형된 캐릭터입니다. 그렇다면 악역 ‘이우진’은 어떨까요? 사실 이우진은 ‘스핑크스’가 변형된 캐릭터입니다. 갑자기 ‘스핑크스’라니 뜬금없게 느끼실 수도 있을 텐데요. 오늘 이야기를 잘 듣다 보면, 그 이유가 이해되실 겁니다.
오늘은 박찬욱 감독의 명작, 영화 ‘올드보이’와 함께 '복수의 역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영화 올드보이의 스포일러와 함께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 잔뜩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올드보이’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창의적이고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변형한 작품입니다. 영화 ‘올드보이’와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먼저 올드보이와 오이디푸스 왕 모두 ‘근친상간’이라는 금기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아울러서,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에 나오는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의 관계 역시 올드보이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올드보이에서 이 관계는 '오대수'와 '이우진'의 관계로 나타나는데요.
여러분은 ‘스핑크스’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대게 우리의 머릿속의 스핑크스는 ‘질문하는 존재’인데요. 이와 마찬가지로 영화 속 우진 또한 대수에게 ‘질문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올드보이는 단순히 오이디푸스 왕의 서사를 차용한 것을 넘어서, 나름대로의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내는 문제를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만 아침에는 네 발이고 낮에는 두 발이며, 저녁에는 세 발인 것은 무엇인가?”
스핑크스의 질문에 오이디푸스는 “그것은 인간이다.”라고 답합니다. 정답을 맞힌 것인데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가 답을 맞히자 ‘수치심’에 ‘자살’을 해버립니다. 여기에서 올드보이와 오이디푸스왕 서사의 공통점이 한 가지 더 발견됩니다. 스핑크스가 질문의 답을 듣고 자살한 것처럼, 이우진 역시 영화의 마지막에 자살을 택합니다.
영화 올드보이는 이처럼 스핑크스를 닮은 이우진을 통해 얼핏 보면 잘 이해되지 않는 스핑크스의 자살에 대한 신선한 재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그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기에 앞서, 스핑크스의 질문과 답을 다시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단순해 보이는 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은데요. 이 문제에는 피험자의 ‘정체성’을 묻는 내용이 숨어있습니다. 그 답은 바로 오이디푸스 그 자신입니다. 문제를 다시 보시죠.
아침에는 네 발로 기어 다니는 아기, 낮에는 두 발로 걷는 어른, 저녁에는 지팡이를 짚어 세 발로 걷는 노인... 그런데 이 존재는 ‘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기와 어른과 노인이 한 존재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는 ‘오이디푸스’가 어머니와 동침한 자라는 사실과 함께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오이디푸스는 두 발로 걷는 어른이지만, 어머니와 동침했으므로 자기가 자기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세 발로 걷는 노인입니다. 또 어머니의 아들이기에 자기가 자기의 자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네 발로 걷는 아이입니다. 그는 곧 자기 자신이자, 자기의 아버지이자, 자기의 자식인 셈입니다. 그러니 스핑크스의 질문은 사실 오이디푸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질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스핑크스의 자살로 이어진 걸까요? 먼저는 이우진의 자살의 이유부터 살펴보아야 스핑크스의 비밀도 풀릴 것 같습니다.
두 이야기 모두 시험자는 피험자가 ‘정답’을 알게 되자 자살합니다. 여기에 비밀이 있는데요. 이는 사실 시험자도 피험자와 같은 죄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영화 올드보이는 오대수에 대한 이우진의 복수극입니다. 이우진은 자신의 친누나와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대수는 이우진과 그의 누나가 애정행각을 벌이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고,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한 것이 결국은 잘못된 소문이 되어 우진의 누나는 자살을 하게 되죠. 이것에 앙심을 품은 우진이 대수에게 복수하는 것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입니다. 영화에서 우진이 복수의 방법으로 택한 건, 대수 역시 자신과 같은 짓을 하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우진은 대수가 자신의 딸인 미도와 사랑에 빠지게 조종했고, 대수와 미도는 서로의 실체를 알지 못한 채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영화의 후반부, 우진은 그런 그들의 실체를 대수에게 알려주었고, 이것을 복수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진은 자신의 복수를 마무리한 후, 누나가 죽은 직접적 원인이 자신이 놓은 손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된 것이죠. 여기서 이우진을 스핑크스의 입장이라고 생각해 볼 때, 스핑크스의 자살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의 답변을 듣고 수치심을 느껴 자살합니다. 수치심은 주로 죄의식으로부터 발생합니다. 그러니 스핑크스가 수치심을 느꼈다는 건, 오이디푸스와 같은 죄를 스핑크스가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죠. 결국 두 이야기의 시험자가 모두 자살하는 이유는, 피험자를 통해 거울처럼 자신의 죄를 명확히 자각했기 때문인 겁니다.
이렇게 영화 올드보이는 수천 년 지난 고대 그리스의 비극을 흥미롭게 재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영화 올드보이가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를 차용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방금 이야기한,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의 관계의 재해석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올드보이와 오이디푸스 왕의 또 다른 공통점인 ‘복수’라는 이야기의 주제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야기에서 그려지는 오대수와 이우진,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인데요. 그러나 그들은 닮아있습니다. 오대수와 이우진은 같은 범죄를 저질렀고, 앞서 시도한 재해석처럼 스핑크스도 오이디푸스와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독은 영화에서 이와 같은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에 대수와 우진 각자의 얼굴 반쪽이 합쳐지며 한 사람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차이’ 대신에, 같은 죄를 저질렀으며 복수 행위에 가담한 행위자들이라는 ‘동질성’에 주목하는 듯 보입니다.
복수는 기본적으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입은 피해를 되돌려주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런 복수를 서로 주고받다 보면 이상하게도 가해자와 피해자는 서로를 닮게 되죠. 가해와 피해라는 ‘차이’ 때문에 복수가 시작됐지만 복수가 진행될수록 이 차이는 사라져 갑니다. 우진과 대수는 서로가 서로를 가해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진은 대수 때문에 누나가 죽었다고 생각했으며, 대수는 우진 때문에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감행했죠. 그러나 누가 유죄이냐를 제쳐놓고 생각해 보면, 결과적으로는 둘 다 ‘폭력’에 물 들었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이런 폭력의 쌍둥이를 <짝패double>라고 명명한 바 있습니다.
적수들은 엄청난 차이에 의해 서로 단절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차이들이 조금씩 소멸된다. 그래서 어디서나 동일한 욕망, 동일한 증오, 동일한 전략, 언제나 완벽한 일치상태에 있으면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믿는 동일한 환상이 존재한다. 위기가 심해질수록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모두 폭력의 쌍둥이가 된다. 우리는 앞으로 이들을 서로서로의 <짝패double>라고 부르기로 하자.
- 폭력과 성스러움 : 제3장 오이디푸스와 희생양, 122p (민음사)
짝패의 적수들은 서로 너무나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항상 닮아있습니다. 대수와 우진, 이 둘은 애초에 너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오대수는 평범한 소시민이었을 뿐이고 이우진은 대기업 오너였죠. 그러나 이렇게 다른 두 명의 인간이 복수의 세계에 진입하자 순식간에 서로를 닮아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가해와 피해라는 입장에서 시작했지만, 각자 받은 만큼 돌려주면서 서로를 닮아갑니다. 이와 같은 복수심은 서로를 모방하며 자라나 결국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 없이 모두를 파멸시킵니다.
지라르는 이런 복수심과 같은 폭력적 갈등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경쟁적인 탐욕을 부추김으로써 갈등을 야기시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그 대상이 갖고 있는 내재적 가치가 아니다. 대상들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도 더 잘 분출할 핑계를 만들어내는 것도 바로 폭력 그 자체이다. 이때부터 폭력이 주도하게 된다. 폭력은 바로, 모든 이가 그것을 지배하려 애쓰지만 모든 사람을 하나하나씩 조롱하는 신성이자 바카스 여신도들의 디오니소스이다.
- 폭력과 성스러움 : 제3장 오이디푸스와 희생양, 122p (민음사)
이 말에 비추어봤을 때 우진과 대수의 경쟁적 복수심을 일으키는 것은 더 이상 그 대상들이 갖고 있는 내재적 가치, 그러니까 복수의 시발점이 된 대수의 한마디나 우진의 감금, 근친상간 행위가 아닙니다. 이런 것은 폭력을 시작하기 위한 계기가 되었을 뿐이고, 실제로 이 대상들 사이로 군림하게 된 것은 폭력 그 자체입니다. 우진과 대수 그 누구도 이 복수에서 승리하지 못하지만, 폭력 그 자체는 당당히 승리합니다. 이 관계 속에서 우진과 대수는 폭력의 하수인일 뿐이며, 그런 점에서 그들은 똑같이 닮아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앞서 살펴본 스핑크스 이야기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결국 오대수와 이우진,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의 관계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복수의 역설’입니다. 우진은 대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가 근친상간을 저지르게 하고 그 사실을 알렸지만 결국 그 과정에서 우진은 자신의 죄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결국 자살을 택하게 되죠. 우진의 복수는 성공한 것일까요, 실패한 것일까요? 확실한 것은 결과적으로 승리한 것은 ‘폭력’뿐이라는 진실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복수를 피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두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 복수심을 잘 다루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이쯤에서 우리는 우진의 대사를 다시 살펴보려고 합니다.
“누나랑 나는 다 알고서도 사랑했어요. 너희도 그럴 수 있을까?”
이 대사에서 우진은 복수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처럼 등가교환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요. 그러나 우진은 결국 등가교환에 실패했죠. 등가교환의 실패는 곧 복수의 실패를 의미합니다.
등가교환이 성립할 수 없는 이유는 첫째로 우진이 죄의 대상을 잘못 파악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진은 자살하기 직전 누나의 손을 놓아버린 게 자신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회상하게 됩니다. 대수로부터 누나의 죽음은 시작되었지만 결정적으로 누나를 죽인 것은 사실 우진 자신이었죠. 우진은 대수에게 책임을 전가하고자 했지만 결국 가장 큰 죄는 자기 자신에게 있었던 겁니다.
둘째 이유는 아무도 자신이 당한 만큼의 고통을 정확히 그대로 돌려줄 수는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나는 내가 받은 만큼의 고통을 돌려준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는 그보다 더 강하게 고통을 받아들일 수도 있는 거죠. 그러므로 정확한 등가교환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등가교환이 애초에 불가능함에도, 계속적으로 등가교환을 시도했기에 우진의 복수는 끝날 수가 없었습니다. 대수의 '혀'가 저지른 '죄'와 우진이 가한 15년간의 감금과 파멸이라는 '복수'는 '고통의 등가교환'이 불가능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우진이 자살을 택하고야 복수는 겨우 끝이 납니다.
우리는 여기서 둘째 이유에 대해 좀 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데요. 가해자의 유죄성이 증명되어 첫째 이유를 만족한다고 해도 둘째가 충족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지라르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것을 ‘공평성’이라는 개념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공평성은 선입견에 대한 단호한 거부, 즉 적수들을 똑같이 취급하려는 확고한 의지이다. … 공평성은 한쪽에서 밀리면 다른 쪽으로 도망치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쌍방이 모두 <옳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폭력은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꺼려하고 있다.
당파성과 공격성에 대한 환상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바로 그곳에서 비극은 시작된다.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 대왕 속에서 오이디푸스, 크레온, 티레시아스는 모두 스스로 공평하게 심판할 수 있다고 믿었던 갈등 속으로 차례로 빠져든다.
- 폭력과 성스러움 : 제2장 희생위기, 72p (민음사)
복수에는 폭력이 수반될 때가 많습니다. 이 폭력은 각자의 입장에서는 모두 옳습니다. 그 생각의 이면에는 자신은 공평하게 심판할 수 있다는 착각이 있죠. 즉 앞서 말한 등가교환이 가능하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오늘 살펴본 이야기처럼, 복수는 복수를 낳고, 결국은 이것을 지배하는 폭력은 파멸적인 결과로 이어집니다. 지라르의 “폭력은 이유가 없다”는 말은 어떤 이유로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말인데요. 요즘처럼 혐오와 차별이 많은 시대에 우리는 이와 같은 지라르의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은 갈등과 혐오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젠더 갈등, 세대 갈등, 부의 양극화 등으로 우리 사회는 몸살을 앓고 있지만 이 갈등들이 더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 갈등들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면, 영화 올드보이를 통해 본 '짝패'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서로가 가하는 폭력을 서로가 모방하면서 점차 차이는 사라지고 갈등은 더 심화됩니다. 그리고, 이 관계의 최후의 승리자는 오직 ‘폭력’뿐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지나친 복수심에 사로잡혀 서로에 대한 폭력을 계속 이어가게 되면, 사회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마치 우진과 대수가 서로의 복수를 모방하다 시작점보다 훨씬 파괴적인 방식으로 마무리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서로에 대한 복수심으로 인해 이런 모방적 짝패 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올드보이의 주인공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결말을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소위 말하는 ‘미러링’, 즉 받은 대로 되돌려주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요? 물론 이런 복잡한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100%의 해결책은 없을 겁니다. 다만, 먼저는 내가 가진 나만의 공정성으로 누군가를 심판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고 폭력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직면한 혐오와 폭력적 갈등의 문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과연 분노와 폭력, 혐오를 넘어 조금 더 나은 내일을 만들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