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소마'를 통해 보는 차이 소멸의 축제와 '희생양 메커니즘'
혹시 영화 미드소마에서 이 장면들이 지닌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평소라면 인간과 식물, 인간과 동물은 이런 식으로 결합되거나 동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인공들이 미드소마에 참여하는 순간부터 이들은 혼재되기 시작합니다. 구분돼야 할 것은 구분이 되지 않고 차이나야 할 것은 차이 나지 않게 되는 것이죠.
영화에서 이런 현상은 표면적인 장식이나 환각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인간 제물들의 고통과 기쁨 등의 감정들도 미드소마는 공유합니다. 개인이 보통 혼자서 누리는 감정들을 이들은 함께 나눕니다. 때로는 다소 폭력적인 방식이라 할지라도요.
개인의 자아나 정체성처럼 평상시에는 분명 구분 지어질 영역들이 이곳 ‘호르가’에서는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우리가 익히 알던 ‘차이’들은 지워지고 소멸됩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오늘은 여름철 힐링영화(?)로 명성이 자자한 아리 애스터 감독의 영화 ‘미드소마’를 통해, '광기의 축제'가 보여주는 인간세상의 폭력과 혐오의 메커니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 미드소마 편은 ‘『폭력과 성스러움』 제 5장 디오니소스와 제 6장 모방 욕망에서 무서운 짝패까지’에 전적으로 의존하였습니다. 원서를 알기 쉽게 이해하고 대중적 사례를 통해 충실히 해설하는 데 주안을 두었습니다.
※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차이 소멸의 축제
영화 미드소마는, 스웨덴 헬싱글랜드 지방의 '호르가'라는 마을의 ‘미드소마’, 즉 하지 축제를 배경으로 한 공포영화입니다. 우선 우리는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호르가’를 포함해 모든 사회에 흔히 있었던 '제의적 성격의 축제'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제의란 '제사의 의식'을 말하는 건데요. 그런데 이와 같은 축제에서는 대게 ‘금기의 위반’이 일어납니다. 축제 전 평상시에는 허용되지 않았던 일들이 축제 때에는 일시적으로 허용됩니다. 대표적으로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사육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축제 기간 동안 여러 형상의 가면과 화려한 의상을 입고 축제를 즐기는데요. 이 기간 동안에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낮은 계급의 시민들이 권력자들을 조롱하거나 풍자했습니다. 권력자들도 엄격한 신분 사회의 답답함을 잠시라도 해소해 주기 위해 이를 허락했다고 하죠.
베네치아 사육제 속에 있는 '금기 위반'을 잘 살펴보면 ‘차이의 전면적 소멸’이라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축제 중에는 가족과 사회의 위계질서가 없어집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복종하지 않고 하인은 주인을 외면합니다. 신하는 군주에게 굴복하지 않습니다. 정체를 숨겨주는 가면과 옷으로 인해 그들의 정체성은 희미해집니다. 겉모습으로 볼 때 그들은 짐승 같기도 하고 인간 같기도 합니다. 광대 같기도 하고 귀족 같기도 하죠. 그리고 그 무엇도 아니기도 합니다. 미드소마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호르가의 사람들은 미드소마 축제 동안 개개인에 대한 구별과 존중보다는 협동적이며 집단적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제의적 성격의 축제가 ‘차이소멸’ 현상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베네치아가 사육제를 통해 신분사회의 답답함을 해소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차이소멸은 폭력이나 갈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복종하지 않고 하인이 주인을 외면하는 것은 ‘갈등상황을 재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죠. 실제로 갈등상황에서는 대상 간에 갈등이 심화될수록 나이나 신분 등의 격차는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차이소멸’인데요. 차이의 소멸은 이처럼 ‘갈등의 심화’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영화 올드보이 분석에서 다뤘던 오대수-이우진의 관계를 떠올려보시면 이해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가해자와 피해자로 갈등이 시작되었지만 서로에게 당한 만큼 보복을 주고받으면서 대수와 우진은 닮아가게 되었죠. 차이 소멸이라는 것은 이처럼 폭력과 갈등 상황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둘의 차이가 소멸되어 간다는 것. 달리 말해 둘이 닮아 간다는 것은 둘의 행위가 비슷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차이 소멸을 재현하는 이유
그렇다면 올드보이 같이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복수극도 아닌데, 미드소마나 베네치아 사육제는 왜 이런 차이소멸로 인한 위기 상황을 재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서로 간의 신분이나 격차를 무시한 채 차이를 소멸시키는 행위는 올드보이의 결말처럼 참여한 대상 모두를 파괴시킬 수도 있을 텐데요. 예를 들어 베네치아 사육제를 통해 민란이 일어나거나 함부로 자기감정에 공감하려 드는 호르가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마음이 생길지도 모를 일 아니겠냐는 거죠.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들이 차이소멸을 재현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요?
사실 이런 위험한 재현은 축제의 결말을 통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축제는 한결같이 그 결말에서 '희생양 살해'가 이루어집니다. 사실 이 축제는 이처럼 희생양을 살해하거나 응징하는 ‘카타르시스’적 결말을 위해 설계된 것이기 때문이죠. 모든 갈등과 폭력, 차이소멸의 위기는 그 책임을 소수의 희생양에게 물음으로써 해소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왕따 문제'를 예시로 들어 보겠습니다. 가해자들은 자신들에게 쌓인 분노와 스트레스의 원인이 마치 피해 학생에게 있는 듯이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피해 학생과 전혀 관련 없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피해 학생이 좀 특출 나거나 모자라다는 이유로, 혹은 자신들과 좀 다르다는 이유로 희생양을 삼고 문제의 원인을 묻는 것입니다. 가해자들은 피해 학생을 괴롭힘으로써 쌓여있던 폭력성과 스트레스를 배설합니다.
축제 시의 차이소멸 재현과 희생양 살해는 이런 왕따 현상을 제도화한 것과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인간 공동체의 특성이 축제라는 형태로 재현되었다는 건데요. 개인적 원한이든, 공동체의 폭력이든 어차피 이 모든 책임은 축제 끝의 희생양이 지고 가게 됩니다. 희생양이 죽게 되면 사람들은 스트레스와 폭력이 그들 사이에서 사라지게 된다고 느끼죠. 이런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오히려 차이가 사라지는 위기나 상호 간 폭력을 일부러 재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소 위험할 수도 있음에도 이처럼 차이소멸의 축제가 허용될 수 있습니다.
호르가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화사한 옷을 입고 밝게 웃습니다. 그들은 모든 행동을 함께 하죠. 함께 하는 수준이 아니라 모두가 같은 사람인 듯이 행동합니다. 이처럼 미드소마는 구성원 간의 차이가 아예 붕괴되어 버렸습니다. 차이가 극단적으로 소멸되어 붕괴되었다는 것은 곧 구성원 내부의 폭력을 극단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극단성은, 미드소마를 통해 희생양 살해의 카타르시스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죠.
베네치아 사육제의 가장 오래된 의식은 사순절 전 목요일에 황소 1마리와 돼지 12마리를 대중들 앞에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미드소마는 축제의 마지막에 9명의 제물을 바치죠. 대니는 자신을 배신한 남자친구를 제물로 선택하고 환하게 웃습니다. 대니에게 쌓였던 부정적인 감정들은 크리스티안을 죽임으로써 해소됩니다. 대니의 카타르시스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고 크리스티안은 응당 그것을 받을만한 죄를 저질렀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일 겁니다.
물론 이런 대니의 생각은 이상하다 못해 끔찍합니다. 영화에서 크리스티안이 저지른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화형 당할 정도는 아니죠. 극 초반에 대니는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이기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대니가 이런 끔찍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축제가 진행되면서 그녀는 이 축제 속으로 자신의 트라우마들이 하나둘씩 녹아드는 것을 경험합니다. 축제라는 차이소멸의 재현에 그녀 자신의 개인적 트라우마가 섞이게 되는 건데요. 그 결과로 결말의 희생양에게 죄를 전가시키는 것도 더불어 쉬워집니다. 말하자면 그녀가 겪은 모든 우울과 트라우마의 원인은 희생양에게 있다는 겁니다.
꽃과 곰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대니는 식물이나 꽃과 동화된 이미지로 제시됩니다. 크리스티안은 곰과 동화된 이미지로 제시되죠. 꽃은 군집형이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꽃은 늘 다른 종류의 꽃들과 함께합니다. 또 꽃은 수동적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꽃은 외부인이 꺾을 때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식물성 환각제나 버섯차를 먹고, 죽은 나무에 희생양의 재를 뿌리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이 군집되어 활동하고 수동적인 꽃의 이미지는 호르가 주민들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요. 늘 모든 감정과 행동을 함께하며 90년마다 이루어지는 미드소마라는 이해하지 못할 축제를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은 꽃의 군집성과 수동적인 무력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 곰은 개체화되어 있습니다. 곰은 영화 초반부터 불길한 무언가로 제시되기는 하지만 곰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려주지 않죠. 우리에 갇힌 곰을 보고 무엇이냐고 묻자. 잉마르는 그냥 곰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열심히 마을의 이모저모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곰의 존재는 무시되거나 은폐되고 있습니다.
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영화에 제시되지는 않지만, 우리는 곰의 이미지를 꽃과 식물의 이미지와는 반대로 추론해 볼 수도 있습니다. 동물인 곰의 이미지는 개체적이며 능동적입니다. 곰은 홀로 우리에 갇혀 있고 통제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꽃과 달리 곰은 자신을 해치려는 존재에게 보복을 가할 수도 있죠. 호르가 사람들에게 있어 통제할 수 없는 곰은 이방인이자 위협적인 존재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곰은 희생양 삼기 딱 좋은 존재입니다.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결국 호르가에게 반항하지 못하는 존재. 곰이 모든 불길과 흉악의 상징이라고 해도 호르가 사람들은 믿지 않았을까요?
꽃과 곰의 이미지가 대니와 크리스티안에게 입혀지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대니는 호르가 사람들과 동화됩니다. 반면, 크리스티안은 호르가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죠. 식물적이며 무죄인 대니가 동물적이며 유죄인 크리스티안을 죽이면서 영화는 복수를 완성하게 됩니다.
이처럼 미드소마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았을 때는 단순히 연인에 대한 복수극이지만, 인류학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는 인간이 복수에 정당성을 만들어가는 메커니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흔히 개인적 감정으로 여겨지는 복수가 집단적 차원으로도 쉽게 전염되고 정당화된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죠. 오늘 살펴본 것처럼 이런 사회적 메커니즘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여러 제의적 성격의 축제에 고스란히 녹아져 있으며, 미드소마와 같이 이런 것들을 소재로 한 영화나 여러 이야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희생양 선택
그렇다면 '희생양'은 어떤 기준으로 선정되는 것일까요? 희생양은 그를 둘러싼 군중들과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그 특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희생양은 군중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희생양은 군중들 사이에서 이방인처럼 여겨지지만 지나치게 먼 존재는 아닙니다. 또 희생양은 군중들과 닮은 사람이지만 지나치게 똑같은 존재도 아니죠. 희생양의 가장 큰 특징은 내부도 아니고 외부도 아닌 중간 지대에 걸쳐있는 존재라는 겁니다. 이들을 ‘경계인’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왜 군중은 희생양을 선택할 때 이런 ‘애매한 지대에 있는 자’를 고르는 걸까요?
이는 앞서 이야기했던 카타르시스 효과의 극대화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개인 간의 차이가 없고 모든 것을 함께하는 그들의 모습은 희생양을 죽였을 때의 카타르시스를 더 잘 느끼기 위해서 선택한 과정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 선택에 대해 많은 이들이 동의할수록 그것이 합당하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진실과는 별개로 말이죠. 이 만장일치가 이뤄지면 죄의식도 희미해지기 마련입니다. 죄의식이 희미해질수록 희생양이 더욱 유죄라고 느끼는 법이며 그가 심판받았을 때의 쾌감도 더욱 커지는 법이죠.
희생양 선택의 기준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군중은 자기들 사이에서 발생한 모든 폭력과 위기의 원인이 희생양에게 있다고 생각하며 그를 비난하고 죽입니다. 만약 이때 그들이 선택한 희생양이 자기들과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자연히 군중은 그를 희생시키기가 힘들 겁니다. 자기와 비슷한 누군가가 희생양이 될 수 있다면 자기 자신도 얼마든지 희생양으로 선택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며 이는 공동체 자체를 완전히 붕괴시킬 수 있는 선택이 되니까요. 마찬가지로 군중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이방인을 희생양으로 선택해도 희생제의는 성립되기 어렵습니다. 공동체가 겪는 문제의 책임이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방인에게 있다고 믿기는 어렵기 때문이죠. 이렇기 때문에 희생양은 공동체의 내부와 외부 동시에 속해 있는 ‘경계인’으로 선택이 됩니다.
영화에서 제물들을 호르가 마을로 부르자마자 잡지 않는 이유도 이런 희생양의 선정 기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호르가 사람들이 이방인을 외부에서 부르자마자 죽였다면 그들 내부의 폭력은 적절히 해소될 수가 없습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자에게 자기들의 문제의 책임이 있다고 여기기는 어려우니까요. 희생양들은 호르가 마을과 어느 정도 동화될 필요가 있기에 마을 주민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적인 희생양 조작은 원시문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딩카족’의 거대한 가족 희생은 비슷한 유형의 희생 예비 작업을 보여줍니다.
딩카족은 어떤 동물을 그 무리에서 끄집어내자마자 곧 희생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사전에 미리 그 동물을 선택하여 무리에서 떼어내어 사람 거주지 가까이의 특정한 장소에 둔다. … 그리고 그들은 그 동물이 공동체에 접근하고 공동체에 더욱 밀접하게 통합되도록 기원한다.
-폭력과 성스러움, 제10장 신, 죽은 자, 성스러움 그리고 희생대체 411p
이 인용문에서 우리는 영화 미드소마 속 ‘우리에 가둔 곰’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호르가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서 곰도 인간 희생양만큼이나 이방인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렇기에 곰 또한 제물로 쓰이기 위해선 충분히 호르가 마을과 통합될 필요가 있었기에 곰을 일정 기간 동안 우리에 가두어두었던 거죠.
또 다른 희생양, 오이디푸스
호르가 마을의 희생 예비 작업이 너무 낯선 희생물을 사회에 통합시키는 방향이었다면 그 반대의 방향도 있습니다. 즉 공동체 내부의 희생물을 낯선 것으로 만드는 방법인데요. 대표적인 예시로 『오이디푸스 왕』의 오이디푸스를 들 수 있습니다. 흔히 오이디푸스는 프로이트가 창안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오늘 살펴보고 있는 르네 지라르의 관점에서 오이디푸스는 ‘무고한 희생양’입니다.
오이디푸스는 테베라는 도시의 왕입니다. 그런데 극이 진행될수록 그는 점차 공동체의 외부적인 존재가 되어갑니다. 먼저 눈여겨볼 점은 그가 ‘왕’이라는 점인데요. ‘왕’은 공동체 내부의 존재이지만, 그가 가진 강력한 권한과 지위는 그 자체로 집단의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만드는 특징이 됩니다. ‘왕’은 그 지위자체로 ‘경계인’의 특징을 갖게 된다는 거죠. 이는 오늘날 사회적 갈등상황에서도 보통의 사람들 보다는 사회 고위층이나 정치인이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서 오이디푸스는 희생양으로 선정되는 과정에서 유죄성이 입혀지게 됩니다. 그는 자기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기 아버지를 살해하고 자기 어머니와 동침했습니다. 그는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기에 테베 사람이면서도 외부적인 속성을 지니게 되죠. 이런 오이디푸스가 죽음으로써 관중들은 카타르시스 효과를 느낍니다.
희생양의 관점에서 오이디푸스를 본다면 그가 지나친 사회적 비난과 그로 인한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델포이의 사제들은 선왕 라이오스를 죽인 자 때문에 테베에 역병이 돈다고 말함으로써, 테베에 역병이 도는 이유가 마치 오이디푸스 개인의 범죄 때문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사실 실제로는 역병과 개인의 범죄 사이에는 아무 인과관계가 없는 데도 말이죠.
호르가의 희생양
호르가 마을 사람들이 제물들에게 죄를 부여하는 방식도 딩카족이나 오이디푸스 왕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미드소마는 내부인과 외부인을 동시에 제물로 바친다는 점에서 딩카족의 방식과 오이디푸스왕의 방식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죠. 호르가 내부인들의 경우 절벽에서 떨어진 두 노인을 마치 왕처럼 떠받들고 모든 권력의 중심인 것처럼 모시는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그 이유는 호르가 내부인 제물에게 외부적 속성을 더 부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호르가 내부인이더라도 귀족이나 왕은 그들의 신분과 권위로 말미암아 외부적 존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죠.
호르가 외부인들의 경우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일정기간 집단과 함께 생활함으로써 내부인적 속성을 부여하는 과정뿐 아니라, 일부러 범죄를 저지르게 유도합니다. 조상들을 태운 재가 쌓인 나무에 오줌을 싼다거나 호르가의 경서를 몰래 찍는다거나 하는 행위들은 호르가 사람들에 의해 크게 비난받을 수 있거나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범죄입니다. 이런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조쉬와 마크는 살해당합니다. 미드소마가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어찌 보면 마을 사람들은 이들이 죄를 짓기를 원했다고 봐야 합니다. 이들이 죄를 지어야 희생양을 삼을 구실이 생기기 때문이죠. 제물로 선택해서 데려온 이방인들을 어딘가 좀 이기적인 사람들로 택한 이유도 이들이 호르가 공동체 내부에서 쉽게 죄 지을 만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안의 희생양 메커니즘
그런데 오늘 살펴본 희생양 선정의 조건과 희생양 메커니즘은 신화에나 존재할 것 같은 이야기로 보이기도 합니다. 또는 사이비 종교에 빠진 이들의 미친 짓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죠.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광기에 빠진 사이비 집단이 저지른 미친 짓으로 치부하기 전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대니는 영화의 마지막에 복수를 완성하고 이처럼 환하게 웃는데요. 사실 대니는 호르가 마을과는 전혀 무관한 보통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복수는 신화적이고, 비이성적인 ‘미드소마’ 속에서 이루어지고, 정당화됩니다. 이처럼 우리 사회 안에서도 우리 안의 폭력이나 스트레스를 해소할 때, 미드소마가 보이는 '희생양 메커니즘', 즉 희생양을 선정하고 희생양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과정이 얼마든지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자신이 자각하지 못하더라도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구조 안에서 평범한 사람도 끔찍한 폭력에 가담하는 가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 연예인이나 정치인의 사생활에 대해 하나 되어서 함부로 판단하거나 심판하는 것일까요? 소위 ‘튀는 자’들은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한 것 마냥 비난하면서 자신은 비슷한 죄를 조금이라도 지어보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걸까요? 나의 개인적 문제가 타인을 험담하거나 비난하는 방식으로 해소되었다면 이것이 대니의 이별복수극과 크게 다른 문제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 사회의 내부적 갈등이나 폭력을 어떤 특정인을 희생양 삼아 해소하고 있다면, 우리 사회에도 미드소마의 희생양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요?
사실 가장 큰 문제는 ‘희생양’이 무고하게 희생되는 경우입니다. 물론 한 톨만큼도 죄가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대중에게 철저히 짓밟힐 정도의 문제가 아님에도 큰 비난을 받고 혐오의 대상이 되는 희생양들도 분명히 존재하죠. 그리고 마치 미드소마처럼, 사람들은 누군가를 희생양 삼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행동을 어떻게든 정당화하고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와 같은 대중의 폭력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요?
최근 몇 년 사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유명인과 관련한 안타까운 사건들이 있습니다. 언론의 근거 없는 의혹제기, 과도한 비난과 혐오, 그리고 유명인의 극단적인 선택, 이후에 알고 보니 대부분의 의혹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는 과정까지... 이런 사건들은 '미드소마'가 단순히 영화 속 사건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우리 현실 속에서 동일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과연 나는 이런 혐오와 폭력의 메커니즘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은 어찌 보면 혐오가 일상이 된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온라인 커뮤니티나 SNS는 혐오와 폭력의 확산에 큰 역할을 하고 있죠. 온라인 세상에서 일어나는 혐오와 폭력들이 우리의 삶에 실제 위협으로 다가오는 경우들도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과연 이것들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실 내가 얼마든지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 우리 사회가 희생양 메커니즘의 구조 속에 많은 폭력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나 자신의 행동뿐 아니라, 우리가 속한 사회와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과연 폭력과 혐오의 메커니즘을 넘어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