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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Jan 14. 2024

우리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지


2022년 8월 3일 물의 날


징조는 그때부터 있었다. 독서며 기록이며 열심이던 시절에도, 예열만 하다 식기를 반복했었지.


목차와 발췌문, 서평을 훑은 끝에 결제버튼을 누르고, 드디어 현관 앞에 놓인 택배상자를 집어들곤 신발장 앞에 선 채로 개봉한다. 상자의 밀폐된 공간 속에 고여있던 냄새, 손바닥에 부드럽게 감기는 표지, 총체적으로 완성되는 실물의 실감 따위를 음미하다 빳빳한 책등을 거머쥐고 드디어 페이지를 넘겨보는데... 놀랍게도 아무런 마음도 일지 않는다. 책을 향한 흥미가 급격하게 수그러들고, 언젠가 읽겠지만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는 책은 아무렇게나 책장에 꽂히고 만다. 어느 시점부터는 샀으니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 읽지 않을 책을 또 샀다는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책의 존재감은, 지난 봄인지 지지난봄인지 냉동실에 넣어둔 인삼뿌리나 들깨가루, 딱 그 정도가 되어 버렸다. 다른 점은 끝내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


심지어 하루키 신간들도 그 짝이 되어버렸다. 그중 하나는 그가 일절 다루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아버지에 관한 에세이였는데, 출간 광고를 보자마자 하루키 상, 당신의 1인칭 단수 세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소스라치며 구매했고, 그 책만큼은 읽을 거라 생각했다. 해가 바뀌도록 내 책장 우측 하루키 코너에 고스란히 꽂혀 있다.


이렇게 놔두다간 이 오래된 관계가 끝장나리라는 예감이 들었고, 이 예감은 틀리지 않으리라는 불길한 예감마저 들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내게 필요한 건 ‘데드라인’과 ‘독촉’이라고. 어떤 일을 끝내게 하는 확실한 수단 아닌가. 이미 내 안에 자신을 견인해갈 열정도 의지도 없다면, 외부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지. 그렇게 도서관 나들이가 시작됐다.


올 들어 내 시간은 2주라는 새로운 마디를 (다시) 갖게 되었다. 책상에 욕심껏 쌓아놓은 책에 시선이 가면 집 나갔던 의무감이 되돌아온다. 독촉문자가 온다. 느슨했던 마음에 텐션이 생긴다. 연장/연체시킬 땐, 누군가의 읽을 권리를 침해한 듯한 생각에 아, 이런 게 부채의식이었지 싶다. 간혹 J의 회원카드로 연체된 걸 재수없게 걸리기라도 하면 잔소리 폭격이 쏟아지는데 효과가 그야말로 아주.... “아니, 읽지도 않을 책 왜 빌려오는데, 것도 내 카드로!” 읽지 못할 책 빌려오는 마음을 다름 아닌 너는 잘 알 텐데, 이런 변명은 짜증만 돋을 뿐이라 한번 꼭 안아주고 내 방으로 잽싸게 도망간다. 그럴 때면 회의감(의무감과 부채의식으로 책을 대하다니), 귀찮음(굳이 이렇게까지), 실망감(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재미없네), 공허감(얼어붙은 바다는 그냥 얼어붙은 채로 놔두자) 따위가 두더쥐처럼 머리를 쳐들고, 나는 냉큼 두들겨 없앤다. 책 읽는 데 언제부터 거창한 목적이나 의미 따윌 찾았다고... 그냥 읽었지. 재밌어서 읽었고, 달리 할 게 없어서 읽었고, 없어서 못 읽은 적은 있어도 있는데도 가만 놔둔 적이 있었던가. 만화책은 걸으면서도 읽었고, 샤워할 땐 샴푸 성분이라도 읽었다.


구차하게 넷플릭스 탓을 하고 싶진 않다. 특히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우영우는 죄가 없다.


 책과 나, 우리 사이에도 노력이 필요하게 되었을 뿐.
애정이 가시고 무엇으로도 무감한 마음,
그 빈 자리에 책무감만이 웅크리고 있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읽는 행위가 지속된다는 것.
그것만이 중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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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반납 알림 톡을 받고선 도서관 책들이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집안 곳곳을, 심지어 차 뒷좌석까지 뒤진 끝에 정작 노트북 가방 앞주머니에서 문제의 책을 발견했다. 존재감이 아니라 부피감이 부족해서 몰랐다. 손도 못댔는데 이를 어쩔...


허겁지겁 읽기 시작했다.

오한기의 <산책하기 좋은 날>.

핀시리즈는, 작고 얇고 가볍고, 와 자켓 호주머니에도 들어간다. #산책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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