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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lander Jan 16. 2024

가성비 좋은 산책의 목적

오한기, <산책하기 좋은 날>

나는 가장 저렴한 주제이다. 재료는 나의 육체이고, 내면이고, 정신이다.
- 오한기



#오한기 #산책하기좋은날 #핀시리즈 #현대문학 #팬데믹 #산책 #나와도시와걷기


“돈이 들지 않고 감정 소비와 시간 낭비를 하지 않는 것. 즉, 가성비가 좋은 산책의 목적에는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찾아낸 게 있었다. 바로 나였다. 나는 가장 저렴한 주제이다. 재료는 나의 육체이고, 내면이고, 정신이다. (...) 내면 여행을 떠나자.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실체가 있는 여행을 해보자. 공간. 내가 살았던 공간들, 인연이 있었던 공간들을 차례로 떠올렸다. 물론 의심은 들었다. 회귀본능. 나도 이제 아저씨가 된 건가? 이러다가 <나의 아저씨>가 인생 드라마라는 선배들의 의견에 동조할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인가. 20대 때는 아무렇게나 써도 실험적인 글이 됐는데, 이제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아저씨 같은 글을 쓰게 되는 나이에 이르렀도다.” pp.53-54


2022년 8월 8일 독서일기 중에서


1. 삶의 곤궁을 토로할 때조차 시종일관 유쾌하다. 이토록 산뜻한 환멸이라니.


2. 사건이 아닌 주인공의 동선으로 이어진 소설. 주구장창 걷고 걸을 뿐인데, 왜 재밌었을까. 역시 문체의 매력=화자의 매력=소설의 매력?


3. 영화사 콘텐츠 기획팀에서 일하는 ‘나’는 코로나 발발로 한 달째 재택근무 중이다. 월급도 삭감됐는데 청탁받은 소설을 써볼까, 부업으로 수익형 블로그·유튭 컨텐츠 제작? 아니면 못해본 여가생활? 그러다 산책에 나선다. 중랑구 묵동에서 시작된 산책은 서울 우측에 해당하는 총 10개(!)의 자치구를 가로질러 구리시와 안산을 찍고 야근에 시달리는 공무원 친구 dz의 집에서 일단락되는데...


4. 주인공 나(도 ‘오한기’인데, 정지돈 작가 같은 실제 지인이 등장하는 등 작가와 인물의 경계가 의도적으로 뭉개져 있어서 작가의 실제 일상을 읽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이 에세이 같은 소설에서 잠시 휴업 중인 소설가이기도 한 나)로부터 어쩐지 친근한 매력을 느꼈다.


시니컬한 유머감각과 허당기, 영리한데 어수룩하고, 궁시렁거리면서도 할 건 하는, 평범한 일상을 살다가 황당한 사건 속으로 멱살 잡힌 채 끌려갈 법한, 그런 인물. 누가 있지? 얼핏 스쳐 지나가는 얼굴은 2000년대 초반의 존 쿠삭...인데, 내가 뭘 본 걸까. (작중 외모묘사로는 봉준호감독을 닮았다고 한다.)


5. 소설은 경쾌하다. 밀도 높은 사유나 사건, 정서들로 숨막히게 하지 않는달까. 별 생각 없이 걷고 있구나 싶은데, 그 탓인지 주인공이 확실히 걷고 있다는 실감을 받았다. 무목적성, 생각 없이 혹은 생각 속에 배회하듯 걷기, 걷다가 빠지는 백일몽, 그렇게 “무작정 걷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보이는 낯선 광경.” “자기 갱신의 느낌.” 갈림길 앞에서 “우연과 무의식에 의존하기.” 산책의 묘미는 이런 게 아닐까.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서울숲에서 중랑천을 향해 걷다가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겪는다. 


“한적한 산책로는 축복이라고 되뇌며 걸었고 한동안 충만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는 무언가 허전했다. 무언가를 보며 걷고 있었고, 무언가를 들으며 걷고 있었고, 분명 무언가를 감각하며 걷고 있었지만 그게 뭔지는 말할 수 없는 데서 오는 기운 빠지는 감정이었다.”


이 감정의 원인을 ‘나’는 “목적 없음”에서 찾는다.


“목적없음의 공포. (...) 어느 순간 산책에도 목적이 있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빗속에서 장시간을 걸은 뒤 허무감을 느꼈던 게 떠올랐고,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하다가 내린 결론이다. 목적이 없다면, 힘들여 걸을 게 아니라 구글맵 따위로 돌아다니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탄식했다. ‘나’를 뜯어 말리고 싶었다. 한기씨, 이미 우리는 ‘목적 있(어야 하)는 삶’에 짓눌려 있는데 굳이 산책에서까지 목적을 찾아야 할까요. 이런 독자의 바람에 아랑곳없이 ‘나’는 가성비 좋은 산책의 목적을 찾아내고 마는데, 바로 ‘나를 향한 여정’. 그렇게 ‘나’는 어린 시절 살았던 문정동 훼미리 아파트를 찾아가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이 뜬금없는 만남에 웃음이 빵 터졌다. ㅋㅋ 맞아, 오한기 작가의 소설 읽는 재미가 바로 이런 것이었지.  


6. 모처럼 ‘걷는 행위’로 꽉 채운 책을 읽었다.


7. 챕터가 끝날 때마다 구글맵으로 동선을 확인하곤 식겁했다. 나 같은 인간이 시도할 거리가 아니었다. 나라는 인간은 목적이 있어도 “힘들여 걸을 게 아니라 구글맵 따위로” 돌아다닐 거다. 독특한 지형지물이 나올 때면 거리의 스트릿뷰도 살폈다. 그러다 내 눈이 나도 모르게 하는 짓을 깨닫고 말았다. 대학들을 기점으로 맵핑하고 있었다...


#책산책자 이전에 #입시생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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