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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새로움을 바랄 때

스캇 펙,《아직도 가야 할 길》

by islander

2025. 1. 16. 낭의 날.


올해의 첫 책을 찾아 책장 앞을 서성이다 스캇 펙의 책을 꺼내들었다. 한창 미술심리치료에 관심 있었을 무렵 사둔 책이었다. 페이지 테두리가 노르스름했고, 밑줄은 1부에만 남겨져 있었다. 애지중지 모셔둔 책들은 어찌된 게 집합만 풀린 수학 문제집 같다. 그거라도 읽어 다행인가. 밑줄 그은 문장들만 빠르게 훑었다. 몇 줄에 불과한 흔적들이 그 시절의 나에 대해 귀띔해주는데, 무언가는 확연히 달라져서 무언가는 지나치게 그대로라 놀랍다.


네가 문제 해결에 참여하지 않으면 네가 문제의 일부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훈련을 해야 하는가.


책의 1부 ‘훈련’편은 소제목만으로도 이미 모범답안지 같다. 현실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즐거운 일로 도피하지 말 것. 선택의 고통을 감내할 것. 결정에 책임질 것. 진리와 현실에 충실할 것. 균형을 잡기 위해 무언가(자신의 일부조차) 포기할 것. 익히 들어온 조언들 아닌가. 그러니 깨우치기 위해 읽는 책은 아니다. 그보다는 망설이는 등을 힘주어 떠밀어주는 책이다.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 괴로워서 귀찮아서 불편해서 두려워서 안하는 날들을 보낼 때, 혹은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하여 변화와 도전, 계획과 실천을 도모할 때 읽기 좋은 책이다. 역시 새해 첫 책으로 좋겠다. 책장에 도로 꽂아놓으려다 내 방 책상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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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출간된 지 벌써 수십년이 지났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즐거움을 미루라’는 조언은 마시멜로우 세대에게는 자명한 삶의 기술이었겠으나 현세대에게는 시대착오적으로 들릴지도.


‘미래의 불확실한 행복을 위해 현재를 갈아넣어야 할까. 보장되지 않은 성공을 위해 이미 불타고 있는 계층간 사다리에 올라 자신까지 불태워야 할까. 그보다는 자신을 보존하고 돌보는 삶이 낫지 않을까. 당장 내 손에 주어진 달콤함과 그것이 주는 위로를 누리는 게 과연 미래의 안정과 번영을 저당잡는 꼴이 될까.’


이런 의문들은, #softlife #slowlife 를 추구하는 특정 세대만이 아니라 초불확실성 시대를 맞이한 우리 모두가 한번쯤 던져보았을 성싶다.


삶의 가치는 시대마다 다르고 삶의 기술 또한 그에 맞춰 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과 인생의 본질이 바뀌지 않는 한 여전히 공명하는 지혜가 있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류의 지혜들 말이다. 성실한 삶이 더는 미래를 약속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실한 마음가짐이 여전히 약속해주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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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지혜로운 어른의 곧고 힘 있는 목소리를 다시 들어 좋다.


오늘 나는 다른 대목에 밑줄을 남겨 놓았다.


“현실에 대한 우리의 견해란 지도와 같아서 그걸 지표로 삶의 모든 영역을 판단하게 된다. 만일 지도가 참되고 정확하다면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고, 어떤 곳에 가야 할 때는 어떻게 그곳에 도달할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지도가 거짓이고 부정확하다면, 길을 잃게 될 것이 자명하다.” p64
“진실이나 현실이 고통스러울 때는 피하게 마련이다. 우리 자신의 지도를 개편하려면 그러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훈련을 해야만 한다. 그런 훈련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적으로 진실에 충실해야 한다. 현재의 편안함보다 궁극적으로 옳은 일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나 진실 앞에 솔직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개인적인 불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하며, 현재의 진실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 불편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정신 건강은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오늘의 진실에 충실하려는 진행형의 과정이다.” p73
“자기 훈련이란 비본능적인 것을 하도록 자기에게 가르치는 것이라고 정의해도 좋을 것이다. 인간 본능의 다른 특징은- 아마도 이것이 우리를 가장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이겠는데- 비본능적인 것을 행하고, 본능을 초월하여 우리 자신의 본능을 개선하는 능력이다.” p78
“누구든지 삶의 여러 가지 길과 협상할 때에는 자신의 일부를 포기해야만 한다.” p96
“‘괄호로 묶기’란 근본적으로 개인이 안정감을 느끼고, 자기 주장을 하고자 하는 욕구를 잠깐 포기하고, 그 대신 새로운 자료에 적응하여 새로운 성장을 이룸으로써 균형을 이루게 하는 행동을 말한다. 다시 말해 자신을 한쪽에 제쳐 놓음으로써 새로운 재료를 자신에게 혼합시켜 집어넣을 여지를 만드는 것이다.” p106




종종 허무함이 몰려온다. 지혜로운 왕의 대명사인 솔로몬은 부귀하고 영예로운 삶을 보낸 후 말년에 이런 고백을 남겼다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세상사는 형언할 수 없으리만치 피곤하다. 과거의 유령이 현재를 잠식하려 들며 어떤 비극은 태연하게 반복된다. 무엇을 보고 들어도 눈과 귀는 만족할줄 모르며, 솔로몬의 말마따나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는 것 같다...


는 생각에 빠져 있기에 적어도 오늘은 적절하지 않다. 해가 바뀌었다고 설렐 나이는 진작 지났지만, 새해가 시작되는 때만큼은 기세가 필요한 법이니까. 없는 새로움도 만들어보겠다는 기세 말이다. 책을 덮고 이런 저런 궁리를 해본다. 용기가 필요하냐고 떠본다. 기대를 낮추자고 이른다. 시작하기도 전에 뻔하게 보이는 것들이 실상 그렇지 않을지 모르잖냐고 구슬러본다. 세상이 아니라 내가 빤한 인간이 된 게 아니냐고 나무란다. 나를 오래 평안케한 것들과 '지금 그대로의 나 자신'이 방해물이라면 그걸 포기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제자리만 빙빙 도는 듯해도 조금씩 나아가게 될 거라고 다독인다. 그리고 그 길에서 "우리 자신의 관성이라는 본능적 저항을 이기고 성장하게" 하게 될 거라고, 새해에 걸맞는 소망을 가져본다. 스캇 펙은 낡은 자아를 변화시키고 확대하고 성장시키는 힘에 '사랑'이라고 이름 붙였고, '은총'처럼 주어진다고도 했다. 특별하지만 동시에 평범한 새로움들이 어제와 변함없는 일상의 문 밖을 서성이고 있다.


어쩌면 '새로움'은 찾는 게 아니라 알아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메모지에 스캇 펙의 조언을 적어 책상 앞 벽에 붙여두었다.


세상 보는 지도를 끊임없이 갱신할 것.

익숙한 것에는 침묵하고, 낯선 것은 환영할 것.

새로움을 대할 때는 “나의 현재 욕구와 과거 경험 또는 미래에 대한 기대”를 괄호로 묶어 놓을 것.

그리고 '경이'의 눈으로 주의깊게 볼 것.




alex-turcu-d1517_8i_d4-unsplash.jpg 이미지 출처 : Unsplash의 Alex Tur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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