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카 솔닛이 전하는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10년쯤 서서 일하다시피 했으니 그 만큼의 시간은 앉아서 보내도 좋겠지, 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하나 더 고백하자면, 이번 생에서는 결코 그 재미를 알 수 없는 게 있는데 스포츠와 운동, 바로 몸 쓰는 재미다. 이런 상황에 이런 기질의 인간이므로 최근 몇 년의 ‘일시정지’된 것 같은 생활이 정신은 건강하게 했으나 몸은 망가뜨렸다. 오죽하면 한 친구가 “나는 걷는다”라는 책을 추천해줬을까. 훌륭한 책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읽고 걷게 될까봐 읽지 않았다, 라기보다는 딱히 흥미가 일지 않았다. 뭐, 걷고 걷고 또 걷겠지.
이 책도 그러했다. ‘걷기’라니, ‘걷기’의 인문학이라니. ‘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라니. 그게 ‘걷기’라니. 그런데 글쓴이가 누구인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든다>와 <멀고도 가까운>의 저자. 바로 그 ‘리베카 솔닛’이다.
여중여고를 졸업한 뒤 팬심을 불러일으킨 언니는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의 샤를리즈 언니 이후로 처음이다. 책방에서 책을 들었다 놨다를 거듭하다가 (도서관에서 대출하면 날짜만 채우고 반납할 듯하여) 완독의 의지를 다지면서 책을 샀다.
아니나 다를까, 가만히 앉아 읽기 어려운 책이었다. 읽게 되면 걸을 수밖에 없고, 걷다 보면 읽고 싶어지는...
챕터 하나를 끝낼 때마다 동네를 걸었다. 툭하면 샛길로 빠졌고 멀리 에둘러 걸었고 이전에는 걸어서 가지 않았던 외곽을 훑었다. 흉가와 무덤가를 종종걸음으로 지나쳤고 숲으로 둘러싸인 묘한 느낌의 벌판과 추수를 앞둔 금빛 논을 바라보며 서성이기도 했다. 어느 골목에서는 생김새가 판박이인 개 두 마리의 거친 포효에 심장이 펄떡거리기도 했고, 길을 잃고 헤매다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아줌마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내게 흉가와 무덤이 있는 쪽을 산책로로 추천했다;;)
이곳에서 10년 가까이 살았는데도 처음 맞닥뜨린 풍경들이었다.
이게 다 리베카 언니 덕분이다.
오늘은 리베카 언니와 “은총을 찾아가는 오르막길: 성지순례”의 길을 절룩이며 걸었다. 언니가 말했다. 악마가 디테일에 깃든다면, 자신의 악마는 육중한 장화에 깃들었다고. 내 악마는 유난히 살이 도톰한 오른쪽 새끼발가락에 깃들었는데, 동네 순례 좀 했다고 물집이 잡혔다;; ‘십자가의 길’에서 정치적 목적의 ‘단체 행진’, 모금 행사를 위한 ‘걷기 마라톤’, 그리고 ‘광장산책’으로 이어지는 길의 끝에서 언니와 나는 미로라는 “상징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기서 미궁과 미로의 차이점을 배웠다.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미궁(maze)의 목적인 반면, 미로(labyrinth)의 길은 하나뿐이라서, 누구든 계속 걷다 보면 중앙의 낙원에 도달할 수 있고, 돌아서서 걷다 보면 들어갔던 곳으로 나올 수 있다. 미궁이 분명한 목적지가 없는 자유의지의 혼란스러움을 뜻하는 반면에 미로는 구원으로 가는 확고한 여정을 뜻한다는 것도 미로와 미궁의 차이다.(p121)”
아, 그래서 메이즈 러너(The Maze Runner)이고 판의 미로(Pan's Labyrinth)이구나.
그렇다면 내 인생 여정(walk of life)는 미궁일까, 미로일까.
시절(자세 또는 시절운)에 따라 달라지기도 뒤섞기기도 하는 걸까.
창가를 바라봤다. 빛으로 구획 짓는 오후 두시의 해. 소파를 따뜻하게 덮은 햇살. 유난히 선명해 보이는 하늘의 파랑과 아직 시들지 않은 참나무숲의 푸르른 일렁임. 오늘 아침, 도시에 내려앉았던 안개와 몸을 움츠리게 하고 발목을 시리게 했던 차가운 공기는 지난 계절에 대한 기억만 같았다.
책을 덮었다.
미궁이고 미로이고 앉아서 따질 게 아니다.
오늘보다 더 걷기 좋은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걸을 수 있을 때 걸어야 되고, 미궁인지 미로인지는 걸어야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