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중시되는 가치 중 하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다. 경제적 불평등 문제에 대해서는 진영이나 신념에 따라 의견을 달리하기도 하지만 일상에서 타인을 배려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다만 약자에 대한 존중이 제대로 실현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대통령 취임식에서 '다문화'와 '새터민' 대표가 초청된 것은, 목적은 화합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은 보통의 한국인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게 된다. 특정 군집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뭔가 대표가 되어 주목받는다는 것은 이처럼 여전히 사회에서 이들을 차별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지하철도 이러한 일상의 차별이 초래하는 역설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각 칸마다 한쪽 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분홍색 임산부 전용석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임산부들이 지하철에서 앉을 공간을 확보하기 어려운 현실을 반영한다. 노키즈존을 허용하는 사회에서 임산부 전용석이 존재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라 당연하다.
지하철 칸에서 교통 약자를 위해 설정된 터줏대감은 노약자석이다. 기본적으로 노인을 위해 설정된 공간이지만 실제로 그 취지에 맞는 모습을 보이는지 잘 모르겠다. 일단 이름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노약자석은 말 그대로 늙고 병든 사람을 위한 자리라는 의미다.
늙음을 혐오하는 것도 극복해야할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하지만, 일단 그곳에 앉는 순간 자신은 늙고 아픈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진짜 다리가 아파서 앉아야만 하지만 자신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라는 걸 그 순간에 또 확인해야 한다. 꼭 노약자석이라고 불러야 할까. 어른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아 우대석이라고 부르거나, 교통 약자를 위한 존중을 담아 배려석이라고 부르면 안될까.
노약자석이 각 칸의 구석에 있는 것도 마음을 울적하게 만든다. 노인 분들은 지하철에 타면 일단 구석 자리에 앉아야 한다. 노약자석이 비어 있는데도 일반 좌석에 앉으면 피곤한 현대인들에게 눈총을 받게 된다. 지하철이 도착하길 기다릴 때 미리 노약자석임을 표시해둔 곳에서 기다릴 수는 있지만, 기다렸던 곳의 노약자석이 다 차 있으면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노약자석에 앉기 위해 칸을 가로질러 걸어가야 한다. 쓸쓸하다. 반드시 구석에 앉아야만 하는 건, 당신은 더 이상 사회의 주류가 아니니 거치적 거리지 않게 쪼그리고 있으라는 말 같다.
차라리 노약자석이 지하철 칸의 가운데 공간에 위치하면 어떨까. 어느 쪽에서 타든 한눈에 빈 자리 여부를 확인할 수 있고, 구석으로 쫓겨날 필요도 없다. 젊은이들 입장에서도 노약자석의 빈자리가 부족해 양보가 필요한 상황인지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면 노인들과 약자들도 지하철 칸에 탈 때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여전히 우리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임을 좀더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고령화 사회이니 중앙의 넓은 칸 한 두개를 노약자석으로 설정해도 세대 별 자리 분배에 문제가 없을 것이다. 사실 버스는 이미 노약자석이 출입문의 편한 좌석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선례를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당장 세금을 써야 하는 경제정책이라 복지제도는 쉽게 바꿀 수 없지만, 일상에서는 조금만 고민하면 사회 구성원들이 좀더 배려받고 사회에 대한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언젠가 노인이 되고, 구석에 있는 노약자석을 찾아가야 한다. 그전에 세상의 모습을 조금 바꾸어 놓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