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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하남 Jan 03. 2023

가족관계는 선물이 아니다

나의 영화 취향에 대한 잡설

나는 대체로 온건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극단적인 표현을 꺼려하며 주변 사람과 갈등을 겪는 일을 피하기 위해 내 주장을 굽히거나 아예 숨겨버릴 때도 많다. 그런 성향이 얼굴로도 티가 나는지 길에 서 있으면 나에게 길을 물어보는 경우도 많다. 얼굴이 만만하게 생겨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런 나도, 의외로 폭력적인 부분을 즐기는 취향이 있다. 영화를 고를 때다. 나는 때려 부수는 영화를 좋아한다. 시원시원하게 건물과 주변 사물들이 부서지는 화면을 보면 뭔가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사람이 죽는 장면은 가급적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악당의 부하들도 나름 사연이 있고 죽을 정도의 죄는 짓지 않았을 수도 있고, 고용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냥 경비만 선 게 전부일 수도 있는데 주인공의 앞길을 막는다는 이유로 최소한의 죄책감을 느낄 순간도 없이 목숨을 잃는다.


길게 말했는데 아무튼 나는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영화 <리스타트>를 시청했다. 깨어나자마자 자신을 죽이려드는 암살자들을 피해다녀야 하며, 결국 죽게 되면 다시 깨어나는 순간으로 돌아와 같은 순간을 무한정 반복하게 되는 전형적인 타임리프 액션 영화다. 죽음을 가볍게 묘사한 장면들이 거부감을 들게 했지만 별다른 생각 없이 가볍게 보기 좋았다.


영화 속 가부장의 판타지와 현실의 괴리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액션영화에서 뭔가 익숙한 캐릭터이다. 그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지만,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으며 술과 다른 여성들과의 어울림에 취해 방탕한 삶을 살다 이혼당했다. 하지만 전처는 그를 완전히 잊지 못했고 도움을 요청하는 손길을 내밀었다. 별다른 사랑을 베풀지 않았고, 자주 만나지도 않았던 아들은 이유 없이 남자주인공을 좋아하고 잘 따른다. 주인공도 단지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매우 사랑한다. 모험을 겪은 후 주인공은 전처와의 관계를 회복한다.


이처럼 액션영화에서는 이혼남, 또는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은 유부남이 주인공인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나이가 들어도 유통기한이 길게 유지되는 남성 배우의 연배, 그리고 모험을 통해 가족 간의 우애를 다지게 되는 전형적 클리셰가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이런 주인공들은 <리스타트>와 마찬가지로, 대체로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던 과거로 인해 가정을 잃었으나 아이들은 그를 좋아하고 있는 경우가 많고, 모험이나 특별한 사건을 겪으며 신뢰를 얻어 가정으로 복귀하게 된다. 이혼 기간동안 다른 여성들과 즐겼던 과거도 쉽게 용서 받는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남자의 귀책 사유로 이혼한 경우 과연 이런 식의 재결합이 가능하며, 아이들은 아버지를 여전히 좋아하는 경우가 많을지 의문이 든다. 각국 사회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이혼은 여성에게 더 불리한 경력으로 작용하기에 아내들은 쉽게 갈라서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이혼을 택했다는 것은 남편의 귀책 사유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의미다. 이러한 경우 자식들도 아버지와의 인연을 끊거나 교류는 하더라도 핏줄이니 어쩔 수 없이 끈만 유지하며, 아버지를 여전히 존경하고 따르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


영화 속 캐릭터가 처하는 상황과 현실은 이렇게 다르다. 영화를 만드는 남성 감독들은 일종의 가부장 판타지를 묘사하는 것 같다. 제대로 육아와 가사노동에 임하지 않았아도 자식들은 자신을 좋아하고, 본인도 부성애를 진하게 느끼며, 우연으로 찾아온 선물 같은 이벤트로 가족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아니, 그럴 수 있기를 바라는 것 같다.


가족관계도 노력의 산물

가족의 신뢰와 사랑은 단순히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고 무한정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가족관계도 결국 인간관계이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 형성에는 끊임 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서로 배려하고 존중해야 하며 상식을 지키며 대해야 하고, 무리한 요구를 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많은 남성들은 단지 핏줄이라는 이유로 남편을, 아버지를 따르고 믿어주고 잘못은 쉽게 용서해주길 바란다. 정작 본인은 가족들에게 그러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가족들을 함부로 대하고 노력하지 않은 과거는 생각하지 않고, 가족들이 자신을 ATM 기계로만 취급하고 퇴근하면 방으로 숨어버리며, 퇴직하고 갈 곳이 없다며 헛살았다며 하소연을 한다.


하지만 그건 다 본인이 자초한 것이다. 가족의 사랑과 신뢰는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얻어가야 하는 것이지, 선물처럼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남편과 아버지가 필요한 일상에서 가족들을 방치해놓고, 기념일 몇 번 챙기고 비싼 선물 한 두번 해주면서 가장의 권위를 바라는 것은 터무니 없는 환상이다. 근거없는 원망과 판타지는 버리고 육아와 가사노동을 비롯한 가족관계 구축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전제될 때, 은퇴 후 노년의 일상에서 가족들이 함께 있어줄 것이며, 자신의 일상 역시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다. 가족들이 당신을 대하는 태도는 우연이 아니다. 당신이 살아온 삶이 빚어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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