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매체의 구조 비판은 왜 자사 지면 앞에서 멈추는가

경향신문의 두 가지 자기모순

by 레퍼런스

경향신문은 한국 진보 언론의 중요한 한 축이다. 플랫폼 자본주의의 폐해, 알고리즘이 증폭하는 혐오와 차별, 기후위기 시대의 과잉소비 문제를 꾸준히 비판해온 매체다. 사설과 기획기사의 논조는 분명하다. 그런데 같은 지면의 고정 칼럼란을 펼치면, 매체가 비판해온 바로 그 구조를 정당화하거나 윤택하게 만드는 글들이 나란히 실린다. 독자로서 느끼는 괴리는 작지 않다.


두 가지 사례를 들고 싶다.

첫째, 유튜브 콘텐츠 비평이다. 위근우 칼럼니스트는 대중문화 비평가로서 유튜브 콘텐츠의 미학적·서사적 완성도를 짚는 글을 써왔다. 비평 자체의 수준을 문제 삼는 게 아니다. 대체로 나도 공감이 가는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문제는 그 비평이 유튜브라는 플랫폼의 구조적 해악과 무관한 듯 진행된다는 점이다. 같은 신문은 유튜브가 저널리즘을 잠식하고, 혐오 콘텐츠를 수익화하며, 여성 신체의 상품화를 알고리즘으로 가속화한다는 비판을 반복해왔다. 그렇다면 그 플랫폼 위에서 생산된 개별 콘텐츠를 호평하는 비평은, 자기가 발 딛고 선 토대에 대한 최소한의 자의식을 가져야 하지 않는가.


영화 비평가가 헐리우드 자본 문제를 매 글마다 전제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영화는 작품 단위 소비가 기본이지만, 유튜브는 알고리즘 추천 시스템 자체가 콘텐츠 경험의 핵심이다. 어떤 채널에 대한 호평은 그 채널을 알고리즘 상위로 밀어올리고, 그것은 다시 같은 알고리즘 안의 혐오·선정 콘텐츠 노출로 이어진다. 이 구조 안에서 "좋은 콘텐츠"만 골라내는 큐레이션은 비평이라기보다 추천 행위에 가깝다. 경향신문이라는 매체의 무게를 빌린 추천이라는 점에서 더 문제가 된다.


둘째, 패션 칼럼이다. 경향신문은 기후위기와 플라스틱 오염, 과잉생산·과잉소비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루는 매체다. 패스트패션이 의류 폐기물의 핵심 동력이며, 합성섬유가 미세플라스틱의 주요 배출원이라는 사실도 여러 차례 보도해왔다. 그런데 같은 지면의 패션 칼럼은 신상 트렌드를 소개하고 소비욕구를 자극하는 형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한 면에서는 옷장이 지구를 망친다고 쓰고, 다른 면에서는 이번 시즌 무엇을 사야 하는지를 권한다.


물론 패션도 문화의 한 장르이고, 옷에 대한 비평이 곧 소비 권유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패션 칼럼은 압도적으로 트렌드 소개·신상 큐레이션 형식이다. 진보 매체라면 이 형식 자체를 극복해야 한다. 같은 자원으로 노동착취 공급망, 의류 폐기물, 슬로우패션과 수선 문화를 다루는 칼럼을 한 번 더 실을 수 있다. 그것이 매체의 다른 지면들과 호흡을 맞추는 길이다.


두 사례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매체는 구조를 비판하고, 필진은 그 구조 안의 산물을 향유한다. 그리고 그 분리는 "비평가의 자율성"이나 "지면의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그러나 독자가 받는 메시지는 분리되지 않는다. 같은 날 같은 신문에서 한쪽은 플랫폼을 비판하고 한쪽은 플랫폼 콘텐츠를 호평하면, 매체 전체의 비판은 무뎌진다. 한쪽은 과잉소비를 경고하고 한쪽은 소비를 권하면, 언론의 메시지는 희석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개별 필진의 잘못이 아니다. 비평가는 자기 영역에서 자기 일을 하는 것뿐이다. 문제는 편집의 자의식이다. 진보 매체의 구조 비판이 자사 지면 앞에서 멈춘다면, 그 비판은 외부를 향한 비판일 뿐 매체 자신의 윤리가 되지 못한다. 진보 언론의 위기가 자주 거론되지만, 위기는 종종 거창한 곳이 아니라 이런 일관성의 균열에서 시작된다.


편집국은 자사 지면에 대해서도 같은 강도의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 패션 칼럼이 트렌드 소개를 넘어 산업의 구조를 묻는 글이 되도록, 콘텐츠 비평이 플랫폼의 알고리즘 권력을 의식하는 글이 되도록 편집의 방향을 다시 잡아야 한다. 그것이 진보 매체가 진보 매체로 남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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