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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해로 Sep 11. 2021

산업발전 성장기의 노동자들

공돌이와 공순이의 사랑과 꿈

대한민국은 6.25 전쟁을 겪은 후 황폐해진 국가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하여 그 후 1996년까지 7차례의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했다. 경제개발 계획 중에 제5차 5개년 계획(1982~86) 때부터는 산업발전 성장기의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새마을 운동이 농촌을 일으켜 세웠다면, 산업화 물결은 도시를 발전시켰다. 도시의 곳곳에서 공단이 생겨나자 일자리가 넘쳐났고, 농촌의 젊은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향하고 있었다. 도시에 가면 일자리 걱정이 없었으며, 열심히 일하고 착실하게 돈을 모으면 집을 장만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생활을 할 수 있다는 꿈을 품고서.

    

도시의 낮은 산업화 물결 속에 활력이 넘쳐났으며, 밤은 화려한 불빛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술과 음악으로 노동자들의 고단한 일상생활을 달래주고 있었다. 당시에도 근로자들을 위한 근로기준법이 있었지만, 노동자들은 일해서 돈 버는 사람이고 사업주는 일을 시키고 돈을 주면 된다는 사회적 인식으로 노동법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1980년 대 사업주는 직원들에게 절대적인 권력자였으며, 회사의 전체적인 운영을 통제하며 직원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사장에게 아부해서 승진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던 안타까운 시절이기도 하다.

     

1980년대 군대생활에 '줄빠따'라는 군기 교육이 있었다. 부대의 최고참이 기분이 나쁘거나 후임병들의 실수를 보면, 점호시간 이전에 조용한 곳으로 불러내어 계급 순서대로 일렬로 줄을 세워둔다. 12명 정도의 소대병력을 모두 엎드리게 하고 최고 선임이 바로 밑 계급자를 방망이로 엉덩이를 강하게 때리면 맞은 계급자는 다음 계급자를 더 강하게 때린다. 이런 식으로 최하위 계급자까지 맞으면 끝나는 것이 '줄빠따'라는 군기교육이었다. 맨  마지막에 맞는 후임병의 고통은 엄청나다. 맞기만 하고 때릴 상대도 없으니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남자들이 많은 회사는 상명하복의 군대를 갓 제대한 젊은이들이 많아서 회사생활도 군대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윗사람이 시키는 일은 절대복종하는 근로자들이 많았다. 

    

도시의 공단 주변 게시판이나 전신주에는 “급, 사원모집” 공고가 항상 붙어있었다. 공중전화 박스에서 전신주에 붙은 “사원 모집공고”를 보면서 20원을 넣고 전화를 하면 바로 면접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면접을 보면 당일에 근무를 할 수도 있고,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었으니 도시에는 젊은이들이 넘쳐났다. 


남자 생산직 근로자들을 ‘공돌이’ 여자 생산직 근로자들을 ‘공순이’로 불렀던 그 시절에는 1년 동안 악착같이 돈을 모으면 전세를 얻을 수 있었고, 3년에서 5년 동안 악착같이 돈을 모으면 집을 살 수 있었다. 1987년 서울 잠실 주공아파트 13평이 1300만 원이었고, 경기도 도시의 공단지역 다세대주택 전셋값은 300만 원이었다. 


1980년  초·중반의 시내버스 요금은 80원이었고 자장면은 400원, 택시요금 400원, 소주가 190원, 통닭 튀김 3,000원, 40kg 쌀이 28,000원이었다. 근로자들의 급여는 일정하지 않았지만 남자 생산직 근로자들의 월급이 평균적으로 50만 원에서 90만 원까지 다양했다. 어둠 속에서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를 만나지 않는다면 온정이 넘치는 사회에서 걱정 없이 살아가는 시대이기도 했다.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 서울 청계천 7가 평화 시장에서 한 노동자가 자신의 몸을 불태웠다. 화염에 휩싸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절규하며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는데 그의 이름이 ‘전태일’이다. 전태일 열사가 산화한 지 10년이 지난 1980년대 이후에도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조건을 개선하지 못했고, 사업주의 갑질 그리고 남녀 성차별과 불평등 처우는 지속되었다. 결국 노동자들은 1987년 7월 "전국 노동자 대투쟁"을 강행하게 되었다. 바로 전 민주화운동의 열망을 담은 국민들의 "6월 항쟁" 여운이 감돌고 있어서 7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엄청난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인권과 근로환경 개선을 위한 노동운동은 여성들로부터 시작되었다. 1972년 인천 동일방직에서 한국 최초로 여성이 노동조합 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인천에 위치한 동일방직은 1978년 2월 21일 새벽에 일어난 '똥물 사건'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유신정권’이 시퍼렇게 집회를 감시하던 시절임에도 당시 주길자 지부장은 1383명의 조합원들을 모아놓고 대의원 선출을 위한 투표를 강행했다. 당시 전국 섬유노조 동일방직 지부 조합원은 1383명, 그중 1204명이 여성이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못난 남성들이 여성조합원들에게 달려들어 똥물을 뿌린 것이다. 중앙정보부와 경찰 등 정부기관이 개입했던 이 사건은 두고두고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며, 남성 노동자들에게는 부끄러운 역사가 되었다. 

    

똥물 사건 후 9년이 흘러 1987년 현대그룹 계열사인 울산의 현대엔진(주)에서 권용목을 위원장으로 선출한 노동조합은 중공업 분야로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를 허락할 수 없다"라고 말하자 노동자들이 "그러면 당신 눈에 흙을 넣어 주겠다"면서 현대중공업, 현대정공, 현대종합목재 등 현대그룹 전체로 노동조합 설립을 확대하였다. 이것이 1990년에는 전국구 조직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로 이어지게 된다. 또 이런 폭발적 노동자 투쟁은 '민주노조'라는 조직적인 성과로 이루어져 1987년 6월 30일 당시에 2,449개 노조와 90만 6천여 명을 가졌던 한국노총은 12월 말에 각각 3,532개와 117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런 추세는 1988년에도 지속되어 당해 6월 30일엔 단위노조 5만 62개에 조합원 수 151만여 명으로 증가했다. 

     

1980년대 일부 사업주들을 보면 준법정신이 결여되어 있었다. 오로지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사업체를 운영했던 그들은 회사를 차려놓고 개인의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했고, 직원들의 복지나 근로조건을 개선할 의지는 전혀 없었다. 회사에서 일하다 다치면 산재처리는 꿈도 꾸지 못했고, 사업주가 '공상처리'를 해주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프레스 작업을 하다가 손가락 3개가 절단된 근로자에게 3개월 치 월급을 지급하며 퇴직을 강요당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근로자는 자신이 잘못해서 손가락이 절단되었다고 자책하며 사장에게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며 퇴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순진한 근로자들을 악용하는 사업주들은, 필요 없는 직원들을 퇴사시키고 하이에나처럼 먹이를 찾아 '사원모집' 공고를 내고 있었다.

           

지금의 직장인들은 주 50시간으로 공휴일이나 토요일과 일요일은 쉴 수 있지만, 1980년대는 일주일 동안 일요일이 유일한 휴일이었다. 단 하루지만 그마저도 특근을 하게 되면 14일이나 21일 동안 쉬지 못하고 일해야 한다. 일과 생활의 밸런스(워라벨)는 꿈도 꾸지 못했던, 오로지 일을 해서 돈을 벌기 위한 안타까운 시대였다. 

인천 동일방직 안순옥 근로자가 노동부에 쓴 진정서를 보면 그 시절의 근로자들의 근로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조금 이해가 된다.

저는 동일방직 와인다 3반에 근무하는 안순욱입니다.
저는 5년 동안 동일방직에 근무한 여자 근로자로서 ……
5년간 동일방직에 근무하면서 하기 휴가가 한 번도 없던 중에 금년 여름에 하기 휴가를 준다는 소식에 저의 마음은 …… 한 없이 부풀어 있었습니다.
…… 휴가는 15일부터 19일까지 였습니다. 
그러나 저희 3반은 14일 밤일을 하느라 15일 새벽 6시에 퇴근하고 집에 갈 생각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 퇴근 시간만 기다리고 있던 중 퇴근 2시간 전에 와인다 대장 김춘옥양이 작업장에 들어와서 우리 와인다 3반은 6시에 퇴근할 수 없고 두 시간 연장하여 8시에 퇴근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 안순욱의 진정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금수저’와 ‘흙수저’로 분류되는 돈의 기준은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사회 전반에 짙게 깔렸던 시대. 그 아픔의 시대에도 사랑은 지금보다 더 아름답게 피어나는 보석 같은 것이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유일한 감정이라고 믿고 싶었던 사랑.... 그 사랑도 돈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화냥끼 가득한 도시의 흉물스러운 유물이었다. 자본주의 도시가 만들어낸 돌연변이 사랑을 눈물로 닦아내고 마음으로 치유하면서 간직했던 1980년대 사랑 이야기가 기억의 저편에서 다가온다. 

         

과거에는 여성으로 태어난 소중한 생명은 남아선호 사상이란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된 부모들의 고집으로 가사노동과 돈벌이에 청춘을 바쳐야 했다.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는 부모를 보면서, 당연히 가족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 가난의 논리는 얼마나 비참한가? 남성들은 집안의 기둥이라는 말도 안 되는 고집스러운 논리로 공부를 시키고, 여성들은 시집이나 잘 가면 그만이라며 노동을 강요했던 부모들의 무지(無知)가 가슴 시리도록 슬프다. 


진흙 속의 진주 같은 그 시절 사랑은 그래서 더 아름답다. 열여덟 딸기 같은 소녀의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뜨거운 사랑은 가난과 남존여비(男尊女卑)의 편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을지도 모른다. 가난 때문에 결혼을 망설이는 여성들.... 그 순수한 사랑이 돈 앞에 서면 갈등과 절망의 늪에 빠져야 했다. 그토록 가녀린 소녀의 심정은, 장님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임당수에 몸을 던지는 심청이 마음과 무엇이 다를까. 이렇듯 숭고한 여성들의 사랑은 블랙홀과 같아서 세상의 모든 불평등과 편견을 빨아들이고 평등과 희망이 가득한 세상의 빛이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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