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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빛을...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 종소리를 들으며

by 이창우

세월은 돌아보면 참으로 빠르다는 한 문장이 자주 등장하지만 1년을 곱씹으면 결코 짧지 않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멀리서라도 보고 싶어 광장으로 나가 받아온 귀한 기념품 책자를 내게 건네던 어머니는 이제 교황이라는 존재를 기억조차 못한다.


2014년 무신론자에게 보내는 '교황의 편지'를 읽으며 정리했던 그 시절 한 순간을 찾아내기 위해 꽤 시간을 보내면서 닫아 둔 블로그의 글을 찾는다.


지난 시절 써놓은 글을 다시 읽다 보면 그때 그 사람이 지금은 어떤 인물로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쓴웃음을 짓는다. 고단한 시절이 펼쳐지던 글에 담은 마음을 그대로 옮겨 별반 다름없이 지연되어 왔던 오늘을 담는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어린아이도 일찌감치 그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집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이 책은 이탈리아 유력지의 무신론자 언론인 스칼파리가 교황에게 던진 도발적인 질문에 교황이 직접 보내왔던 한 통의 편지에서 시작되어 만들어질 수 있었다. 무신론자에게 보내는 『교황의 편지』를 넘겨가면서 자주 책을 놓아야 했다. 한국사회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는 생각이 더 현실감으로 생생하게 다가왔다. 정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그에 따른 삶은 결핍으로 허기진다.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세계를 향해 소리 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한다.


재보궐선거의 결과를 두고 전문가들의 넘치는 정치판 분석과 대응 전략들도 늘 비슷하다. 정당의 혁신, 새정치의 ‘안철수현상’에 모았던 마음들이 조급하게 달리지만 그 끝은 아직 오지 않았다. 먼 길을 걸어가야 하는 작은 희망들이 또 그렇게 잠깐의 ‘현상’으로 사라지려나 보다. 정치를 정치인들만이 짊어지고 저들만의 이해관계에 의해 작동되어 온 것이니, 그들이 선택한 결과에 대응 또한 그들의 몫이다. 그렇다면 유권자들은 주체적으로 제 역할을 해 왔던가. 인식의 문제이다.


편지를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2천 년 전 한 인간 예수가 일으킨 ‘스캔들’은 그의 놀라운 ‘권위’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전한다. 그리스어로 ‘권위’는 ‘엑소시아exousia’로, 말 그대로 해석하면 바로 ‘자신의 존재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따라서 외부적이거나 남들에 의해 강요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발산되는 어떤 것, 혹은 그 자신으로부터 부과되는 어떤 것이 밖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정신적 지도자. 서글프게도 우리에겐 아무도 없다.


교황의 한국방문을 앞두고 이 땅에서 상처받고 있는 많은 이들의 마음에 관심을 보낼 수 있는 작은 불씨가 피어나길 바라는 마음이다. 국가가 제 역할을 못할 때 발생하는 사회문제들은 개인들이 갖고 있는 선(善)을 파괴한다. 그 선함을 돌보지 않는 이 나라에서 자기 존재의 권위를 되찾아 일어날 수 있는 세기의 ‘스캔들’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위안이 된다. 종교를 뛰어넘어 사람이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기를 멈추지 않았으면 한다.


열어놓은 창으로 밤바람이 소리를 내며 달려 든다. 목을 누르고 치솟아 눈으로 오르는 기운들로 잠시 일어서서 방을 가로질러 심호흡을 한다. 여기는 세월호참사를 교통사고로 생각하는 나라, 의료 민영화를 위해 자본에 국민의 건강을 팔아먹고도 멀쩡한 나라이다. "쌀시장 적극 보호" 대통령의 말장난에 언론이 춤울 추는 나라이다. 각 종 ‘참사’들이 일어나는 데도 현 정권을 지지할 수 있는 나라이다. 곧 터질 원전을 가동하는 나라이다. 이게 정치판만의 문제일까. 유권자들의 분별력이 절실하게 발휘되어야 했다.


야권 참패를 마주하고 추스르는 시간을 보내고 잡은 이 책에서 유리벽으로 둘러싼 한국사회를 만난다. 눈에는 보이지 않아 단절로 일어나는 충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벽이다. 국가의 폭력들에 피해자들은 각자의 아픔을 홀로 견디어 내야 하는 참으로 쓸쓸한 곳이다. 국가의 의무를 다 하라는 말로 개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나라이다. 이런 죽음의 나라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은 실낱같은 빛으로 다가온다. 현 정권의 양심이 이 빛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라는 헛된 소망을 품는다.


“우리의 소명은 사람들이 물질적으로나 비물질적으로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는지 가늠하여 그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도록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아가페는 타인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것은 남을 개종시키려는 마음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입니다. 타인에 대한 사랑, 그것이야말로 공동선의 씨앗이지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들은 종교를 초월한다. 종교도 사람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한 개인이 선택하는 선함이 공동선으로 향할 수 있는 시작이다. 한국사회의 정서, 정(情)의 문화는 물질을 사람을 위해 취하는 나눔으로 가능하게 했다.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된 무조건의 희생이 아니라 자발적인 헌신이었다. 나의 이해관계가 아니라면 ‘돌봄’이란 말이 너무 생소해진 한국사회, 인간이기에 가능한 유일한 것은 내 옆의 아픈 너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존재이기에 가능했다.


출처: https://felice1916.tistory.com/entry/교황의-편지 [overdye: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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