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적인 두려움
2025년 수능이 끝났다. 수능 때가 되면 초콜릿이나 엿, 떡을 준비하던 일도 그날의 관심도 뉴스 한 꼭지로 들여다보고 지나치는 시기에 놓여 있다.
지금까지 이어진 교육이 여전히 진행될 수 있던 것은 기본으로 깔아놓은 두려움이라는 자본의 논리였다. 탈자본에 관한 본능적인 두려움은 유년 시절부터 노년까지 두텁게 자리 잡혀 있다.
인간적이라는 말은 수식어에 불과한 시대에서 사형제와 관련해 내기를 한 이야기를 떠올린다. 안톤 체호프는 그의 단편에서 15년의 자유와 200만 루블의 '내기'를 자본주의 경제가 시작되었던 시기에 이미 써놓았다.
그 내기는 여러 버전을 거쳐서 청소년들에게 질문하던 일이기도 한데 대부분 200만 루블을 위해 기꺼이 내기에 동승하는 선택을 했다. 자유의 폭력은 자연스럽게 일상에서 일어난다.
이 본능적인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은 내 선택에서 생태적 공동체로 나아가는 대안에서 가능하다. 내가 필요한 만큼의 자유를 누릴 돈과 삶의 의미를 통찰할 기회는 상대적이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생애 주기를 10년으로 나누어볼 때 돌아보면 쉽게 도려낼 수 있는 시간은 결코 아니다. 적어도 대개 20년은 한국사회에서 가족공동체에 줄을 이어야만 자유가 숨 쉴 시간을 얻는다.
내기는 볼링 게임에서 팀으로 나눌 때나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놀이인 내게 돈과 자유는 내기로 걸 수 있는 등가일 수는 없었다. 이 부분에서 어느 정도 미래를 위한 정신승리자가 될 여지는 있다.
지금 어떻게 살아 내고 있는지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가 되면 지난 10년은 어김없이 삶의 지표가 된다. 적어도 1년을 주기로 기본 설정을 할 수 있던 내가 행운아라는 점을 잊지 않는다.
혼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순간에 가족과 지역사회 공동체에서 이어진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삶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로움은 타인의 시선이나 기준에 속박되지 않으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