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고 우리는 곧 헤어져야 했다
그룹홈 아이들과 1박 2일로 감포에 다녀왔다. 코로나만 잠잠해지면 얼마든지 놀러갈 수 있으니 조심하자고 단도리하던 시간이 벌써 1년을 훌쩍 넘겼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아이들을 데리고 기어이 집을 나섰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바다가 보이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바다다!”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이 손에 잡힐 듯한 모습부터가 비현실적이었다. 3월이라도 아직 겨울 코트 없이는 추운 날씨라 바다로 간들 해수욕도 할 수 없다고 했지만, 아이들은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숙소를 나서서 조금만 걸으니 바로 바다가 나왔다. 바다냄새가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머릿속이고 가슴속이고 마구 파고드는 파도소리에 그저 멍해질 따름이었다. 삼킬 듯이 달려오던 파도가 새하얗게 부서지는 모습이며, 조각보처럼 갈라져 일렁이던 물결 모양이며, 깊이를 가늠할 수 없던 물빛이며, 하나같이 바다를 앞에 두고는 어쩔 줄을 몰라서 넋을 놓고 섰다가 사진을 찍다가 소리를 지르다가 했다.
우리 일곱 명이 전부 나오는 사진을 찍고 싶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하나, 둘, 셋 하면, 김치 하세요.” 한 번은 손가락을 벌려 브이를 하고, 한번은 두 손으로 하트를 그렸다. 내내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던 낯선 이가 물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대구요.”
“어쩐지 바다를 보고 너무 좋아한다 싶더라. 대구는 바다가 없죠? 우리는 맨날 보는 게 바다라 별 느낌이 없는데.”
그날 내게,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어서 그렇게 좋았던 것이 사실 바다만은 아니었다.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버린다는 시간의 속성을 차치하고서라도, 나는 다시없을 이 순간을 만끽하느라 사실 더 애틋한 상태였다.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던 것이다. 출산휴가를 떠난 해맑은친구들의집 시설장 자리를 대신하기로 약속한 시간이 딱 1년 3개월이었다. 3월까지 일을 하기로 했으니까, 그룹홈 아이들과 처음으로 떠난 이 여행은 사실상 내게 ‘마지막 여행‘이 되어버린 셈이다. 일정을 모두 마친 밤이 되자, 아이들이 나 몰래 준비한 케잌을 꺼냈고 함께 지낸 시간이 어땠는지 이야기해달라고 자꾸만 치근거렸다. 꼬집히기라도 한 듯이 안경을 감싸쥐고 고개를 숙이자 아이들이 뒤로 물러섰다. 잠도 자지 말고 카드놀이를 하자고 다시 매달렸지만 너무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직은 아이들과 덤덤하게 이별을 이야기할 자신이 없었다. 얼마 전에 오순이가 해주었던 꿈 이야기가 생각났다. 꿈속에서 엄마가 같이 살자고 하면서 오순이를 데리고 집으로 갔다고 했다. 그래서 이모들 잘 있으라고 오순이는 웃으며 인사를 했다고 했다. 나는 아무래도 몇 밤을 더 자야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모”하고 애들이 뒤에서 껴안으면, 좋다고 실실거리며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널던 1년 3개월이었다. 그 중에는 진공청소기를 밀다말고 원격수업 출석 체크는 제때 했냐고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던 때도 있었다. 상담일지를 정리하다 말고, 쇳소리를 내며 다투는 아이들 곁으로 달려가 눈을 더 크게 치켜뜨고 서 있던 날도 있었다. 심심하다고 노래를 부르는 초등학교 1학년 오순이에게, 그럼 30분만 TV를 봐도 좋다고 인심을 써놓고서, 4년치 사회복지시설 평가 서류를 붙들고 머리를 싸매던 날도 있었다. 아기 낳을 때 많이 아프냐는 질문을 퍼붓던 큰 아이들에게 대답을 하다말고 넘겨본 시계가 새벽 2시를 가리키던 순간도 있었다.
그 사이 일순이는 자립을 해서 혼자서 밥도 잘 해먹는 대학생이 되었고, 이순이는 운전면허증을 거머쥐었고, 삼순이는 세번째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고, 사순이는 독학으로 선행학습을 하고 있고, 앞니가 다 빠졌던 오순이는 알파벳을 모조리 익혀버렸다. 그 사이 내 귀밑에 흰 머리도 부지런히 늘어났고 말이다.
그 중의 어느 날은 엄마, 아빠, 그리고 두 명의 자녀가 함께 사는 장소만이 가정은 아니라는 이야기도 나눴던 것 같다. 이모도 아이 둘을 낳았지만, 낳을 때마다 내가 고른 아이가 태어난 적은 없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너희들이 여기 해맑은친구들의집 식구들을 만났던 것처럼, 나도 남편 말고는 식구를 선택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이다. 피가 섞이지는 않았어도 밥 먹는 식탁에서 우리처럼 재잘거리며 웃음이 넘쳐나는 가족은 드물 거라고도 했다. 그런 것 같다고 동의하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신이 나서 재차 옳다고 눈을 맞추었었다.
허튼 소리를 하는 법이 없는 사순이가 말끝을 흐리던 날도 생각이 났다. “나도 결혼을 하고 싶은데….” 싱거운 소리 말라고 타박할 줄 알았던 이순이도 삼순이도 모조리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나도, 하고 따라 나섰다. 그게 무슨 큰 걱정인가 싶어 대수롭지 않게 대꾸를 했다. “결혼이야 하면 되지.”
“결혼할 때 양가 부모님 앉는 좌석 중에서 신부 쪽만 빌까봐 걱정이 되요.”
먼 미래의 결혼도 결혼이지만, 엄마아빠의 빈자리가 세상에 어떻게 비칠까, 남몰래 숨겨오던 아이들의 두려움이 그대로 들러난 말이었다. 아무 걱정 말라고, 이모든 큰엄마든 그 자리는 비우지 않을 거라고 얼른 답은 했지만, 내가 그 자리를 제대로 채운 적이나 있었던가 자꾸만 혼자서 자책을 하게 되었다. 애들에게 ‘이모’라고 불리기는 했어도 정작 ‘엄마’ 같은 이모이기를 얼마나 바랬었는데, 계약기간이 끝나자마자 곧장 떠나버릴 나를 떠올리는 순간, 아이들과 함께 했던 모든 순간이 미안해져버렸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룹홈은 내게 분열 그 자체였다. 직장인데 집이고, 집인데 직장인 곳에서 일을 했으니 말이다. 부모와 헤어진, 혹은 분리되어야만 하는 아이들이 최대한 가정과 같은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내 일이었다. 원가족을 유지한 채, 새로운 가족을 끈끈하게 결속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감정적 고통을 넘어 두 집 살림에서 각자 다른 자아를 능숙하게 운영해야 하는 기술의 문제이기도 했다. 매번 내 한계를 바라보며 자책하는 게 일이었다. 더불어 그룹홈이 가지는 정체성 문제 앞에서 나는 늘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후원금과 보조금으로 생활하는 사회복지시설인 이상, 투명성과 전문성을 유지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였지만, 아이들이 보낸 모든 시간과 비용을 서류로 정리하다보면, 아파트에 두고 온 아이들과 다른 처지에 놓인 그룹홈 아이들의 상황이 순식간에 드러나는 것 같아 매번 마음 한 끝이 정리가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피만 나누지 않았을 뿐 어느 가정보다 화목하다고 얘기하던 내가 딴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나로서는 임금의 대가로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내 아이를 키우면서도 집안일만은 누가 좀 대신해줬으면 좋겠다고 늘 말해오던 사람이었다. 구인 거절을 제대로 못해서 주저앉은 자리였는데, 나도 내가 이곳에서 아이들과 이렇게 빨리 스며들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대구로 돌아오기 전에 한 시간 정도 바닷가에 들러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바다만 바라보다 돌아왔다. 튜브를 들고 가서 물놀이를 한 것도 아니고, 공을 들고 가서 공놀이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우리는 뛰고 소리를 지르고 사진을 찍으며 깔깔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파도를 피해 바다 깊숙이 발자국을 찍고 돌아오는 놀이를 하느라 몰두한 시간은 거의 30분이 넘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파도를 마주하고 바다 속으로 힘차게 달려가 발자국을 찍고 깔깔 웃으며 돌아오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가 좋았다. 옷을 버릴까 해안가를 쭈뼛쭈뼛하던 사순이는 이내 파도에 홀려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신발이고 바지고 홀딱 젖은 채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신발이 젖든 옷이 젖든, 아이들이 그토록 의식하고 두려워하던 세상을 마주보고, 당차게 달려들어가는 것을 보는 것만 같아서 울음이 터지려고 하는 걸 겨우 참았다. 아이들의 발자국은 이내 파도에 씻겨 사라졌지만 그러거나 말거다 다시 달려들어가 발자국을 찍고 웃으며 돌아오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렇게 유쾌하고 뿌듯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 다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아이들이 자라 아름드리 나무를 이루기까지, 그 삶을 받쳐줄 단단한 대지가 되어주기를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2021.03.14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