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여자가 내는 소리가 묘하게 섞여서 내 방 벽을 타고 들어왔다. 고등학교 2학년, 그때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였지만 규칙적인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대번에 맞힐 수 있을 것 같았다. 쉰이 넘도록 혼자 살던 옆집 아저씨가 누군가와 함께 살기 시작한 날이었다.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서는 첫날밤을 치르는 신랑각시를 구경하려고 동네 사람들이 신방 앞에 몰려가 문풍지에 구멍을 뚫고 들떠서 웃음을 터뜨리던데. 나는 주먹으로 벽을 쳐서 두 사람이 더 이상 소리를 못 지르게 하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결혼을 하기 전까지 엄마 아빠와 셋이서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살았다. 기다란 복도를 타고 열두 평짜리 집들이 층마다 여덟 채씩 붙어 있는 곳이었다. 겉에서 보기에는 꽤 그럴 듯했지만 집과 집 사이를 갈라놓은 것은 헐한 베니어합판이 고작이라서 옆집 사람이 내는 소리가 우리집 안에서 울리고는 했다.
엄마 아빠가 자는 안방 너머에는 휠체어를 타는 서른 살 남짓한 아들과 아줌마가 살았다. 여느 때처럼 동네 아줌마 몇몇이 옆집에 몰려와 몇 시간씩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날, 옆집 아줌마가 우리 엄마를 흉보는 소리까지 안방에서 생생하게 들은 적도 있다. 자기 집에서 바퀴벌레가 나오는 건 다 몸이 어눌한 우리 엄마 때문이라고 했다. 자기는 굉장히 깔끔한 사람이라 바퀴벌레가 나올 리가 없다고 하면서.
내 방 너머에는 머리를 길게 기르는 아저씨가 혼자 살았다. 키가 작고 빼빼하고 수줍음이 많은 옆집 아저씨는 말소리를 거의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벽에 뭘 걸다말고 바닥에 떨어드리든, 몸을 부딪치든, "툭"하는 그 별 것 아닌 소리가 베니어합판 사이를 퉁기며 내 방까지 왕왕왕왕 울리고는 했다. 책상에 앉아 숙제를 하다가도, 옆집 아저씨가 지척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서라운드 스피커에서 구현한 입체 사운드처럼 고막을 때릴 때면 몸 끝이 쭈뼛쭈뼛 굳어지는 것 같았다. 아저씨가 별안간 소리의 형태를 하고 내 방으로 침입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끈적끈적하게 밤을 울리던 옆집 소리가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일주일은 지났을까? 갑자기 그 소리가 사라져버렸다. 신라 유적지에서 발굴한 것처럼 굵직하고 누런 고리 모양의 금귀고리와 금반지를 끼고 어깨까지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해사하게 웃던 아저씨가 어깨를 구부리고 슬리퍼를 끌며 다시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우리 아빠 때문이라고 했다.
하루는 옆집 아저씨가 술을 사들고 아빠를 찾아왔단다. 엄마와 이십 년 가까이 해로한 비결을 알려달라고 하면서. 그때 아빠가 그 비결을 말해주었다고 한다. 여자 귓방망이 한 방만 날리면 오래오래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초장에 그렇게 여자를 잡는 거라고 말이다. 그 말을 새겨들은 아저씨가 며칠 뒤에 진짜로 그 동그랗고 포동포동하던 아줌마의 귓방망이를 날린 모양이었다. 그 날 이후로 다시는 아줌마를 보지 못했다.
유독 깜깜하던 그날 새벽이 떠올랐다. 아빠가 엄마 따귀 때리는 걸 처음 본 날이었다. 거나하게 술이 취한 아빠가 환하게 불을 켜고 집으로 들어왔다. 입은 옷 그대로 이불 위를 구르며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는 아빠를 보고 엄마가 옷부터 갈아입으라고 했다. 잠든 아이를 깨우지 말라고 했던 것도 같다. 엄마가 걱정했던 그 다섯 살짜리 아이는 이미 잠이 다 깨버렸는데. 참다못한 엄마가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켜 전깃불을 끄던 순간이었다. 아빠가 뭐라고 소리를 높였다. 그리고는 엄마의 따귀를 내리쳤다.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이부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앉아버렸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오한이 든 것처럼 온 몸이 달달 떨리고 목소리가 나오지를 않았다. 엄마를 지키고 아빠를 혼내야겠다는 생각밖에는 할 수가 없었는데 그때 내가 생각해 낸 거라고는 그저 있는 힘껏 눈을 치켜뜨고 아빠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아빠가 아닌 사람이 된 것처럼 사납게 구는 아빠가 그나마 이런 내 눈을 보지 못한 것이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니, 나를 사랑하는 아빠라면 이런 내 눈을 보고 놀라고 무서워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드디어 아빠와 눈이 마주쳤다. 아빠 눈에서 불이 켜졌다. “이게 어디!”하면서 아빠가 손바닥으로 내 머리를 밀어서 옆으로 눕혔다. 그대로 이불 위에 꼬꾸라져서 가만히 숨을 죽였다. 그 뒤로 별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엄마도 나처럼 소리를 죽이고 가만히 있었던 것 같다.
아빠는 다리가 한 쪽 없는 사람이었다. 사고 때문에 왼쪽 사타구니 아래로 한 뼘 정도만 남기고 모두 잘라내야만 했다. 양 팔에 목발을 짚고 다니는 것이 그나마 가장 간편한 방법이기는 했지만 아빠는 외출을 할 때마다 늘 의족을 낀 채로 지팡이 하나만 짚고 다녔다. 겉보기에는 가장 맵시가 나는 방법이었지만 보기보다 품이 많이 들었다. 일단 아빠 다리와 몸통만큼 길이를 재어서 의족을 맞추어야 했다. 그리고 그 의족 맨 꼭대기에는 털모자 두세 개를 겹쳐 끼워서 그 안에 집어넣을 짧은 다리의 살갗을 보호해야 했다. 나무로 만든 그 긴 의족을 짧은 다리로 움직이다보면 피부가 자주 쓸리고 다쳤기 때문이다. 아빠는 한참을 쪼그려 앉아서 그 짧은 다리에 연고를 바르고는 했다. 남들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상이었다. 그런 일상을 매일 치르며 자신의 장애를 최대한 숨기려 했던 아빠는 외로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귓방망이를 맞아서 아빠와 이십여 년을 해로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냥 갈 데가 없었다. 엄마는 날 때부터 뇌성마비였다. 말을 하거나 숟가락을 집어들 때에도 의도하지 않은 근육이 움직이고 뒤틀리고 경직이 되는 장애였다. 더군다나 엄마는 나를 키우기 위해서라도 아빠 곁을 더 떠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빠가 공장에서 퇴근하는 저녁이면 집 근처 목공소에서 나뭇조각을 하나씩 주워 왔다. 그걸 한 십 여분 조물락거리며 여기저기를 깎아서 나를 위한 뭔가를 만들어주고는 했다. 아빠는 주로 ‘칼’을 조각했다. 꽃이나 토끼 같은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주었으면 하고 바란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칼을 받고 싶은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소리를 지르면서 그 칼을 받아들었다. 무엇이 되었든 아빠가 거의 매일 저녁, 나를 생각하며 뭔가를 만들어준다는 사실이 많이많이 기뻤다.
엄마가 석유곤로에 밥을 짓고 국을 덥히고 생선을 구워서 밥상을 내오던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엄마는 뇌성마비 장애 외에도 아픈 곳이 많은 사람이었다. 누워있거나 병원에 가 있거나 하는 날이 많았다. 그러나 아빠가 일하고 돌아와서 엄마가 차린 밥상 앞에 우리 세 사람이 둘러 앉아 TV를 보고 밥을 먹던 날의 기억은 오래오래 남았다. 며칠 되지 않아서 더 오래오래 기억이 되는지도 몰랐다. 엄마가 고봉으로 푼 밥을 아빠가 한 입 가득 넣고 우물우물 씹어 먹고. 그러다 젓가락질이 서툰 엄마 밥숟가락 위에 생선살을 발라서 얹고. 그러면 엄마는 그걸 내 밥그릇에 옮겨 얹고. 그러면 또 아빠가 엄마 밥그릇에 생선살을 얹고. 천둥이 우르르 치고 하늘이 번쩍번쩍 하고 비가 솨아솨아 내리는 날이었다. 아빠가 물었다. 니 무섭나? 아니! 한 개도 안 무섭거든! 내가 대답했다. 엄마가 그런 나를 보고 좋다고 소리를 내어 막 웃었다.
사춘기가 오고부터 아빠와는 아주 대면대면한 사이가 되었다. 아빠의 부부금슬 비법이라는 그 귓방망이 때문이었다. 아빠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인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빠가 살아온 세상까지 모른 척 내동댕이칠 수는 없었다. 아빠는 아마도 궁지에 몰리고 외로움을 느끼는 순간, 아니 사랑받고 싶은 순간조차도 귓방망이를 내려치는 힘이 간절히 필요한 세상을 살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아프게 했기 때문이다. 매일마다 칼을 깎아서 어린 나에게 선물하고 또 선물하던 아빠의 마음을 짚어보려고 할 때마다 머리가 아득해졌다.
어쨌든 아빠는 틀렸다. 우리 가족을 지켜준 것은, 귓방망이도 칼도 아니었다. 갈 곳이 없어서 외로운 우리 세 사람의 마음이 그저 같이 있던 그 순간이었다. 그저 우리 세 사람이 같이 있는 것. 나는 사실 그것이 제일 행복했다.
2022.5.14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