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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oo Aug 10. 2020

인연

십여 년 전 난 얼떨결에 그리고 하필이면(?) 텍사스에서 내 삶의 또 다른 시작을 하게 되었다. 홀 현단 신이었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상황이었고, 이곳은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로워 외로움마저 느낄만했다. 미국의 모든 곳이 여기 같지는 않겠지만, 학교 근처에 남자 넷이 옹기종기 방을 같이 쓰며 사는데도 서울에서의 시끄러움이나 복잡함도 없었다. 태어나서 평일 날 이렇게 조용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유학생이었다. 당시 어학연수가 유행으로 번지고 각 종 기업들은 스펙상의 어학연수 여부를 보기 시작했다. 나도 이력서에 한 줄을 더 채워 넣기 위해 연수를 왔고 6개월간의 고민 끝에 그 평화로움이 날 붙잡고 말았다.


지금은 미국 학교들이 유학생을 지원하는 시스템이나 장학금 제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만 해도 국비 장학금이나 아주 잘 사는 집이 아니면 학비와 기타 생활비를 빚 없이 모두 충당하는 것은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니 가족들로부터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는 난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일부는 학교에서 혹은 자국에서 장학금을 받는 것도 봤지만, 서민 출신이었고 공부는 시작부터 삐그덕 거린 나에게는 유학생 신분으로 장학금으로 학비를 충당하고 생활비를 동시에 만들어 가기는 이래저래 참 힘든 상황이었다.


안 되는 영어에 낯선 문화와 사람들, 가끔 겪게 되는 차별 아닌 차별들과 당장 다음 달 방세를 걱정해야 하고 학교 성적이 안 좋으면 쫓겨 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 숨죽이며 일하러 다녀야 하는 등, 이건 마치 피부는 숨 막혀 죽어가도 겉은 화려한 경극배우의 짙은 화장을 한 듯했다. 그래도 도움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 불평하기보다는 나머지는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 나가야 했다. 가족들에게는 말하기 싫었던 어려운 길이었지만, 걷고 또 걸어 힘들게 학교도 졸업하게 되었다. 같이 시작한 사람들 중에는 중간에 포기하고 귀국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정착하여 다른 삶을 찾는 이들도 있었으며, 어떤 이들은 외로움에 못 이겨 혹은 여기는 지루하다며 다른 대도시로 향했다. 


그렇게 질척거리며 공부를 끝낼 쯤에는 나보다 한 학기 먼저 졸업한 친구 말처럼 나는 가방끈이 아주 긴 30대의 대졸자일 뿐이었다.


졸업하기 1년 전쯤부터 취업 스폰서를 지원해 줄 회사를 찾아 직장에 다녀보겠다고 사방팔방을 뛰었으나, 순진한 대학 졸업자의 어설픈 학점과 전공을 받아 주는 회사는 찾을 수가 없었다. 영주권 보증을 해 주겠다고 신문에 난 회사들은 타주에 있거나 일부는 영주권 신청 지원을 빌미로 노예처럼 일을 시킨다는 흉흉한 소문 때문에 난 지레 겁을 먹기도 했다. 신청 자체를 받아 주는 곳도 많지 않아 겨우겨우 두세 군데에 신청했지만 아무 곳에서도 연락이 없었고 이내 마지막 학기만을 남겨 두었을 때, 난 처음으로 내 미국 생활과 그동안의 선택들을 울며 후회했다. 한국에서 다시 해보지도 않고 겁먹은 거라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그동안의 고생과 힘듦이 보상받지 못한 것 같아 너무나 억울했기에 그 끝만은 보고 싶었나 보다.


주위의 사람들은 나에게 그냥 한국에 돌아가면 되겠네라고 말했다. 틀린 말도 아니었고 그저 부정하고 싶을 뿐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마음이 조금 차분해질 무렵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솔직히 나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몸이 아파서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우연이었을까 싶게도 그즈음엔 지금의 내 아내를 만나고 있었다. 아픈 사연이 많은 두 사람이 만나 언어장벽도 별거 아니라는 듯 서로를 응원하고 아껴주며 만나고 있었다. 하지만 떠날 준비를 시작하면서 어떻게 내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 어떻게 이별을 해야 할지 참 고민이었다. 그리던 초가을의 어느 날, 솔직한 게 최선이다 라는 믿음에 내 상황을 최대한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안 가는데?"

"많이 힘들었잖아. 여기서 나와 같이 다시 시작할 방법이 있을 거야"


이별하기 전 헤어져야 할 이유를 설명한 것이었지만, 난 그녀가 같이 있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줄은 몰랐다. 내가 너무 무책임했다. 난 그저 또 한 번의 지나가는 인연으로만 생각하려 했으니 말이다. 같이 있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는 나 자신이 너무나 답답했다. 여기저기 알아보고 결국 우리가 택한 길은 결혼을 하는 것이었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이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컸기에 두 번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아내와 난 각자의 어머님에게 전화를 하며 곧 다가올 커다란 태풍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갑작스러운 결혼 소식도 그렇고 서로의 가족들에게는 외국인을 맞이하는 일이었으니, 가족들의 환영을 받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차라리 둘만의 결혼식을 먼저 올리고 전화할 걸 그랬나...


난 부모 자식 간의 연을 끊게 생겼고, 장모님 되실 분은 내일 오전에 자기 딸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설득하기 위해 오신다고 했다. 어차피 환영이나 축하는 기대도 안 했지만, 예상보다 어려울 상황에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그날 해질 무렵 우리 둘은 답답한 마음에 근처 공원에서 두 손을 꼭 잡은 채 걷기만 했다. 내가 나라는 사람이 아닌 누군가의 누구로 살아오면서 눈치가 보여서 였을까... 이런 용기를 내 본적이 없었다. 많은 걱정보다는 더 밝은 희망이 느껴 졌기에 오랜만에 웃을 수 있었다. 이젠 다시 힘들고 어려워도 최소한 내 손을 잡아 줄 사람이 한 명은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눈물마저 나오려 했다. 그리고 아내의 손을 오래도록 잡고 걸을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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