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바이 마이 펜슬

눈을 감자, 동시에 뜨는 것이다.

by 호연지기

걷다 보니
비가 내리더라.
우중충한 날씨였지만
오늘 비소식은 없었으니까.
그랬으니까.
그랬었으니까.
내가 본 기상예보가 잘못된 것인지
기상예보가 나를 잘못 본 것인지
내가 본 기상예보는 오늘자 소식이 맞기는 한가.
오늘, 기상예보를 확인하기는 했나.
뚝.
|

걷다 보니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니 근처 카페로 들어와
그림을 그리려 한다.
원두의 진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아아- 향기로운 커피 냄새..
향기를 코로 빨아들이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근데.
펜이 사라졌다.
분명 쥐고 있었는데
쥐고 있었다.
분명 그랬었는데
떨어트렸나?
없다.
없어졌다.
아니,
애당초 없었던 것인가?
아니다.
분명 내가 쥐고 있었던 건..
뚝.
|

비가 내린다.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는데
우산을 찾던 것일까
억세게 내리는 비를 보니
우산을 찾고 있던 게 분명하다
근데, 우산은 어디 있지?
카페에는 어떻게 온 거지
내리는 비에 옷이 그렇게 젖지도 않았는데
아, 또 기억을 잃은 것이구나
향기로운 냄새
하아– 고소하게 기름진 향기가
오일쇼크 때 대공황의 모습을 그리고 싶어 졌다.
펜을 어디에 뒀더라.
가방에서 꺼내지 않았나?
..
아..!
뚝.
|

따뜻하며 향기로운 커피 한잔이다.
영혼을 데우는 맛이다.
구운 땅콩과 다크 한 초콜릿 맛이구나
하아– 좋다..
비가 오는데
언제쯤 그치려나 생각하다
비 내리는 거리가 무척이나
네덜란드의 로테르담과 같아 보였다.
적당한 커피냄새와 적당한 비냄새
눅눅한듯한 공기에 포근한 카페
적당한 온도에 적당한 햇빛
여유로우면서도 그칠 줄을 모르게
내리는 비를 보며 느끼는 조급함을
그리고 싶어 졌다
조급하다..
조급하다고?
비를 보며 느낀 조급함은
어쩌다 느낀 거지?
아니다.. 꽤 오래전부터 느낀 조급함 인 것만 같다.
뭐지.
뭐였더라
무엇이 있긴 했었나.
무엇이도냐..
무엇이느냐..
무엇이..
뚝.
|

여느때와 다름없는 서초동의 골목은
노후된 거리가 마치
파리의 골목같다.
바닥이 축축하며 햇살이 들어
약간의 따스한 바람이 나의 코를 훑어 가네
하아– 눅눅한 이 공기가 아름답게만 느껴지고
나의 시선으로 들이는 햇살이 노랗게 혹은 푸르게
물들어감에 아름답게만 느껴진다.
내리는 여우비를 잔뜩 맞으며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스스로가 아름답게만 느껴진다.
함박 웃음이 터지며 꺽꺽대며 웃다가.
세상이 이리 아름다웠는가?
생각하길.
아름다웠나?
아름다웠었나?
아름다우려나?
아름다울까?
아른아른하다.
좋은 기억만 가지고서, 전부 잊는것이다.
..
뚝.
|

무엇을 하고 있었더라?
알아도 모른채 하고 몰라도 아는채 하고싶은
나의 심정을 알까.
알려고 할수록 비참하고
모르려 할수록 초라하다.
집으로 돌아간다면
이 마음이 변하기전에
바로 가자.
이 마음이 돌아서기 전에.
그렇게 사라지는것이다.
사라지자.
여백으로 가득 채워진 삶에
그렇게 미를 더하는 것이다.
마침표다.
여백의 점 이 되는것이다.
오점(汚點) 을 남기는것이다
종착점은 곧 다음이다.
세상과 바이- 하는것은
절망감에 용기를 더하는것이다.
좋은 기억만을 가지고서–
떠나보자
가보자
눈을 감자
동시에 뜨는것이다
떠나보자-
뚝.
|

나는
집에 가고 싶은것이다
집에 가면 분명 펜이 있을것이다.
우산도 있을것이다.
흠뻑 젖어 감기에 걸린 나도 있을것이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씻을 힘도 없어 그대로 이불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보다 더 더러워지겠지.
더러운건 내가 아니라 집이니까
아무렴 괜찮다
괜찮으려나.
괜찮을것이다.
그 더럽고 춥고 눅눅한 집보단
그저 춥기만한 공허속으로
가보자
떠나보자
더 할 나위 없이 나빠질 것도 없으니 괜찮다.
괜찮으려나
괜찮을것이다.
가보자
떠나보자
안녕 – !
잘가–¡
안녕 – !
잘가–¡
뚝.
|
|

...
..
.